[탈시설 사회를 바라는 가족 증언대회] 평범하지 않은 우리 가족 은서네, 영서로 살기 - 영서
- 2024.04.25 08:4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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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시설 사회를 바라는 가족 증언대회]
평범하지 않은 우리 가족 은서네, 영서로 살기 - 영서

내가 생각해도 난 되게 멋있는 사람
27살 영서라고 합니다. 바야흐로 10년 전에 학교의 종교 강요를 이기지 못하고 청소년 인권운동을 시작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좀 불의를 잘 참는 어른이 되고 말았어요.(웃음) 고3 때 ‘아수나로’라는 단체를 만나서 같이 뭐라도 해보자고 했어요. 학교에 대자보도 붙이고 1인 시위도 하고 자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서 졸업했죠. 이후로 종교 수업이 의무사항이 아닌, 선택으로 바뀌긴 했어요.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민망하지만, 그 당시에 저는 좀 되게 멋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어린 나이에 하기 힘든 일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캐나다에서 인권 공부를 하고 있고, 잠시 휴학 중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동생이랑 알콩달콩 잘 지내고 있어요.
우리 둘이 살아왔어요.
부모님이 헤어지시면서 어렸을 때부터 여기서 살았다 저기서 살았다 그랬어요. 할머니랑 살기도 하고, 고1 때부터는 아빠랑 동생이랑 셋이 살다가 고3 때 저만 가출해서 잠시 엄마랑 살았어요. 그러다 다시 친구 집에서 살았죠. 생일이 빨라서 19살에 학교를 졸업했는데, 20살부터는 동생 은서랑 둘이 살았어요. 아빠가 근처에 사셨고 경제적으로 지원을 해주셨어요. 엄마는 동생의 장애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셔서 지금도 동생과는 교류가 없어요.
은서는 괜찮겠다, 잘할 수 있겠다!
동생이 학교 전공과 다닐 때 2년 정도 같이 살았어요. 은서가 학교 다니면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아무도 걱정이 없었어요. 선생님들이 학생을 세 분류로 나눈대요. 첫 번째는 취업이 어려운 학생들, 두 번째는 보호작업장 같은 곳에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학생들, 그리고 세 번째는 그냥 일반취업을 도전해볼 수 있을 법한 학생들로요. 세 번째 해당하는 학생들이 전교에 딱 3명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 은서라고 했죠. 학교 선생님들이 동생은 취업도 할 거고 진짜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나요.
동생에게 힘든 일이 겹쳐왔어요.
은서가 졸업할 때쯤에 다른 힘든 일들이 겹쳐서 심리적으로 힘들었던 것 같아요. 아주 친했던 친구랑도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학교도 가기 싫어했고, 우울해졌던 것 같아요. 이후에 집이랑 가까운 사회적 기업에 취업했는데 일주일 다니고서 계약이 안 됐죠. 내가 일하러 가야하니 동생에게 10시에 집에서 나가라고 하고 나가면, 동생은 10시 59분까지를 10시로 받아들이고 늦게 나가는 일들이 있었어요. 제 일이 너무 바빠서 동생이 출퇴근하는 걸 잘 못 챙겼던 것도 있죠. 그래서 아직도 아주 미안하고 아쉬워요.
그즈음 제가 워킹홀리데이로 캐나다로 가게 되었어요. 캐나다행을 결정하게 된 건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 저는 해외 문화를 접하는 걸 아주 좋아했어요. 내 앞가림도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동생까지 돌봐야 하는 부담에서 조금은 벗어나고 싶기도 했죠. 실제로 캐나다에 가보니 내 앞가림만 잘 하면 되는 세상이 잠깐이나마 펼쳐졌고, 참 홀가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캐나다에서 5-6년을 살았어요. 하지만 은서가 잘 못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많이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어서 우울했던 감정이 커졌어요.
언니 없이도 괜찮은 지원체계를 만들고 싶었지만
한 빌라 건물에 아빠도 살고 동생과 저는 따로 3층에 살았었는데, 제가 캐나다로 가면 저랑 친한 활동가 2명이 저 대신 은서랑 같이 살면서 은서를 좀 돌봐주고 대신에 월세를 안 내기로 했었어요. 근데 제가 가고 두 달 만에 아빠가 친구들을 내쫒으셨어요. 그리고 동생은 아빠랑 같이 살게 됐죠. 아빠는 심신이 매우 아프셔서 동생을 돌보지 못했어요. 특히 은서가 밖에 나가는 걸 너무 싫어하셨고, 활동지원사 같은 외부인이 집에 오는 것도 싫어했어요. 그래서 동생이 계속 집에만 있었고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우리 둘 다 충격을 받았어요.
그러다 캐나다 가서도 한국에 왔다 갔다 하는 시기가 생겼어요. 캐나다 있을 때도 은서가 많이 보고 싶었어요. 늘 같이 지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살았으니까요. 그때마다 서울에 따로 집을 구해서 동생과 같이 지냈어요. 서울에서 두 사람이 지낼 단기 집을 구하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깨졌죠. 코로나 터진 직후에 아프기도 해서 한국에 들어왔을 때가 있었어요. 당시 동생의 상황에 충격을 많이 받아서 6~7개월간 동생과 같이 지냈어요. 동생이 할 수 있는 것들이 매우 줄어있었고, 우울증이 심했어요. 저랑도 거리감을 두려고 해서 진짜 충격받았어요. 밥 먹으라고 하면 다 토하고 제대로 못 씻고 긁어서 피부에 딱지가 생기고. 그런데 내과를 엄청나게 다니면서 내시경까지 해봐도 아무 이상도 없다고 신경성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정신과도 다니고 피부과도 다녔죠.
부모님이 싫다고 하면 무엇도 안되는 거예요.
한국에 와 있는 동안 많이 힘들었어요. 낮에는 온라인으로 학교 다니고 은서를 돌보고, 먹고 살아야 하니 일도 해야 했어요. 그러다 동생이 건강도 회복하면서 저도 2020년 11월에 다시 캐나다로 돌아갔는데 친구들에게 차비랑 밥값 쥐여주고 동생이랑 산부인과에 가게 했어요. 아빠를 계속 쪼기도 했죠. 다행히 다시 만났을 때는 동생 건강이 나빠지진 않았더라고요. 동생을 지원해줄 곳을 찾아서 얘기는 많이 해봤어요. 그런데 활동지원사건 뭐건 부모님이랑 같이 살고 있으니까 부모님이 싫다고 하면 안되는 거예요.
온전한 한 시민으로 살 수 없다는 비참함
작년 6월에 다시 한국에 와서 2개월만 있을 계획이었는데, 1년이 되고 더 길어지고 있어요. 은서는 20세 이후 5년 만에 서울시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를 시작했어요. 그 사이에는 아무 소속감 없이 산 거죠. 저도 고등학교 이후 대학에 바로 가지 않았는데 그때 느꼈던 감정이 은서와 비슷했던 것 같아요. 캐나다 처음 갔을 때 취업이 안돼서 너무 힘들 때 너무 비참했어요. 바쁜 도시의 사람들도 다 바쁘게 출근하고 학교 가는데 나 혼자 갈 데가 없는 거죠. 공원에 쪼그려 앉아서 당장 갈 데가 없다는 게 되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어요.
은서가 힘들 때 집 근처 주간보호센터에도 다 연락을 돌려봤었어요. 2년은 대기해야 한다고 했어요. 서울에서는 은둔형 외톨이 지원사업도 한다는데 외톨이로 살 수밖에 없는 발달장애인이 얼마나 많겠어요? 거주지는 경기도라 서울에 집중된 지원체계를 활용하기도 어려웠어요. 경기도도 그런데 저기 다른 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겠어요? 한 온전한 시민으로 살 수가 없는 거죠.
서울대 입학보다 더 들어가기 어려운 지원주택 입주
작년부터는 은서 자립을 위해서 지원주택을 신청했어요. 2022년 12월에 접수하고 2023년 5월에 발표하기까지 피가 말랐던 것 같아요. 심사 기간이 너무 길었고 3월에 면접 보기 전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었어요. 9명 입주가 가능한 집에 63명이 지원해서 경쟁률이 7대1이었어요. 누가 어떤 근거로 되었는지 모르지만, 심사기준도 모호해요. 이 정도면 서울대 입학보다 더 어려운 거 아닙니까?
경쟁률 듣고 입주가 안 되겠지 싶어 포기했어요. 면접을 보러 갔을 때는 서울시 복지재단 직원 두 분이 지원한 분이 많다고 하시면서 다른 지역은 어떠냐고 물어봤어요. 은서는 은평에서 살아서 은평으로 가고 싶었기에 더 포기하게 됐죠. 그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었던 것 같아요.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일들
내가 한국에 오면 은서가 잠깐 상황이 좋아졌다가, 내가 없으면 다시 원상 복귀되고 그 과정에서 은서가 받는 스트레스나 상처를 생각하면 그게 너무 싫었어요. 은서가 신체적 건강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게 너무 많아요. 그런데 지원주택에 입주할 수 없으면 다시 아빠 집으로 가게 될 거에요. 그러면 외출도 잘 못 할뿐더러 서울시 공공일자리를 할 수 있는 자격조건 조차 안 되거든요.
저는 서비스직에서 일하니까 주말에 활동지원사선생님도 쉬시고 하면 저녁밥 차려주고 씻기고 잘 시간에 일하러 가서 주말이 제일 힘들거든요. 은서가 직장에서 월요일마다 회의하는데 주말에 뭐했는지 얘기하는 시간이 있대요. 근로지원인 선생님이 주말에 뭐했냐고 물어보면 집에만 있었다고 하기가 너무 민망한 거예요. 그래서 주말에 쏘다니면서 바다도 보러 가고 롯데월드도 가고 해요.
돌봄의 책임은 가족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요.
주변에 비장애형제자매 친구들이 몇 명 있어요. 그런데 비슷한 상황이라는 거 알면서도 서로 가족 얘기를 절대 안 해요. 그분들은 나를 보면서 장애가 있는 형제자매에게 못하는 게 생각나서 죄책감을 느끼고, 나는 그 사람들이 부러운 거예요. 동생한테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 상황들이 부럽죠. 한국에서 발달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려면 헌신적인 어머니와 경제적인 여유가 되는 환경이 없으면 어렵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런데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용산지회장님이 저를 처음 만났을 때 해주신 말이 있어요. 돌봄의 책임은 가족과 부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부모운동의 핵심인데, 그 책임을 자매인 제가 지고 있는 게 아주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씀이 위안이 많이 되었어요.
은서만의 단호한 스타일
지금은 은서가 원래 학교를 다니던 은평지역의 지원주택에 입주해 살고 있어요. 가끔 제가 쉴 때 은서 집에서 자고 가는데, 한번은 자고 가도 되느냐고 물어보니까 단호하게! 안된다는 거예요. “안 돼, 안 돼. 언니 가가가” 이러는 거예요. 정말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애걸복걸 부탁하니 마지못해 알겠다고 자고 가라고 하니까 옆에서 듣고 계시던 활동지원사님도 막 웃으시더라고요. 자기만의 공간이 생겨서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은서가 공공일자리 직장생활 한 지 거의 1년이 다 돼가면서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가고 있어요. 어느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해요.

수용을 강요하는 비겁한 심사기준
아직 동생의 월급관리를 해주고 있어서 고민이에요. 동생이 혼자 밤에 편의점에 가서 한 달 반 만에 150만 원어치를 사서 먹기도 한 적이 있어서 그렇게 했죠. 원래 활동지원서비스도 월 90시간인데 동생이 일하면서 그나마 늘어난 게 180시간이에요. 코로나 때 주민센터가서 활동지원서비스 좀 더 늘려달라고 했어요. 장애정도도 심해졌고, 아버지도 나이가 많으시고 코로나 때문에 갈 데가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심사를 요청할 수 있는 기간도 지났고 아버지는 60대 초반이라 65세를 넘지 않아서 재심사도 어렵다며 문전박대를 당했어요. 들은 체도 안하더라고요. 우리 몸은 우리가 제일 잘 알고, 어느 정도 지원이 필요한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아는 건데, 심사 기준으로 지원이 필요한 시간을 판정한다는 게 사실 말이 안되죠. 심사 기준조차도 모호해요. 심사하시는 분이 은서랑은 말 한마디도 안 섞어 보시더라고요.
더 필요한 시간에는 더 부족한 지원체계
처음에 은서가 받은 활동지원시간 90시간에서 일자리를 갖게 되면서 30시간 추가, 근로지원인 60시간이 늘어난 게 180시간이에요. 더 추가되는 요인은 없었어요. 그러면 활동지원사 선생님이 9시에 오셔서 6시에 가시는데 5시 반에 저녁밥을 먹어야 하죠. 보통 사람은 그렇지 않잖아요. 지원주택도 1대1로 매칭되는 시스템이 아니니 추가적인 지원을 요구하긴 어려워요. 시간이 모자라니 은서가 출근하지 않는 금요일에는 활동지원사 선생님이 11시에 오셔야 해요. 주말에는 더 힘들죠. 지원주택 인력도 더 적고, 활동지원사 선생님은 시간이 모자라니 아예 못 오시니 주말엔 은서가 우리 집에서 자기도 해요. 어쩌다 지원주택 여자 선생님이 출근을 못 하시기라도 하면 은서가 혼자 있게 되는 시간이 많아지기도 해요.
돌봄서비스를 우선 시했던 캐나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것 힘들잖아요.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는 코로나 기간 동안 사회복지사 인력난이 굉장히 심해졌어요. 사람들이 실업급여를 받기도 하고 코로나 기간에 특별 실업급여가 나오면서 한 달에 170만 원씩 나왔거든요. 사람들이 코로나로 인해 대면으로 일하는 것을 피하면서 활동지원사들은 캐다다 달러로 최저시급 14달러 (한국 돈으로 1만 2천원 정도) 보다 높은 17달러를 받았대요. 그런데도 사람이 안 구해져서 19달러(약1만 7천원)까지 올랐죠. 캐나다 정부는 코로나 이후에도 임시로 올렸던 활동지원사들의 시급을 영구적으로 유지하겠다고 발표했어요. 지금은 더 올랐을 수도 있어요.
네가 원하는 삶은 뭐야?
누가 제 꿈이 뭐냐고 물으면, 제 꿈은 은서랑 둘이 할머니가 되는 게 꿈이에요. 은서랑 같이 귀여운 할머니가 되는 거죠. 예전에 한국 발달장애인 통계에서 평균 사망 나이가 55세였던 걸 본 적이 있어요. 요즘 세상에 55세에 죽는 사람이 어딨어요?
우리는 행복한 할머니가 되는 게 꿈이에요. 청소년 운동을 하면서 성인기를 맞는 게 무섭고 부담스러웠어요. 지금은 많이 컸고, 대단한 생각을 하진 않아요. 은서에게 결혼하고 싶은지 물었더니 너무 하고 싶다는 거예요. 애기도 낳고 싶고. 그래서 깜짝 놀라서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지 아냐고 물으니, 아기는 귀엽게 생겼대요. (웃음) 아직 은서도 결혼 생각은 못 하고 있고 저도 그렇고요. 그런데 한국 사회는 대학에 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애를 낳고 하는 게 좀 정해져 있잖아요. 그래서 뭔가 원하는 삶의 모습은 뭔가라는 고민을 잘 못 하게 되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비장애인도 그런데 발달장애인, 중증 발달장애인에게는 물어보지도 않죠. 예전에 어떤 발달장애인 분이 자기는 커피가 싫은데 왜 사람들이 자꾸 바리스타 교육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왜 장애인은 바리스타 아니면, 동료지원가 사업 밖에 안 시키냐고 말씀하시는데 그게 진짜 맞는 말인 것 같거든요.
20대 은서의 용용탕과 탕후루 같은 시간
은서 집에 갈 때 탕후루를 사간 적이 있는데 엄청 좋아하는 거예요. 활동지원사 선생님이 이 바삭바삭한 게 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요즘 20대는 마라탕에도 환장하거든요. 은서랑 먹으러 갔더니 용용탕이라고 하면서 계속 먹으러 가재요. 귀여워요. 용용탕이 너무 먹고 싶다고 하는데 그게 뭔가 했더니 마라탕이더라고요. 재밌더라고요. 지원주택에는 아홉 분이 사시는데, 은서보다 한 살 어린 24살 여성분이 친구가 되었더라고요. 둘이서 여기저기 많이 놀러 다니기도 해요. 은서는 시큰둥한 편이지만 친구분은 활발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분이에요. 친구 분이 은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언니 이쁘다고 그러죠. 활동지원사까지 네 분이 같이 서오릉 산책하러 가고 까페도 가고 밥도 먹으러 다닌대요.
해고될까 무서운 12월
낮에는 서울시 중증장애인 공공일자리 다니는데 비정규직이에요. 12월 말이 너무 무서운 거예요. 1년마다 재계약을 하는데 지금은 더 불안정해요. 작년 말 재계약 했을 때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요. 전체 예산은 그대로인데, 사업에 참여하는 지자체가 서울시 전역으로 늘어나면서 고용승계가 되지 않은 분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11월쯤 면접을 다시 보고 그 다다음날 발표가 나면 그 다음 주부터 다시 출근을 하는 거예요. 떨어지면 다음 주부터 출근을 못 하는 거라 대비를 못 하게 되는 거잖아요. 사실 일반 직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거죠. 해고하려면 해고 수당도 줘야 되고 고용승계도 고민해야 하는 건데.
실수할 권리가 있는 주체로
사람은 사실 내일모레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내가 없어지면 은서가 취약해지잖아요. 발달장애인이 핸드폰 사러 갔는데 한 달에 요금 50만 원 나오는 이런 일이 있는 세상이잖아요. 비장애인 여성으로 사는 것도 얼마나 힘들어요. 그런데 발달장애인 여성으로 산다는 게 너무 힘든 일이죠. 그래도 실패하고 실수하고 뭔가 부딪히고 좌절하고 이런 과정들이 있음으로써 누군가가 발전하고 성숙해질 수 있어요. 그런 기회를 빼앗긴 사람들이 청소년이기도 하고 장애인이기도 해요. 청소년들도 발달장애인인 은서도 실수할 권리가 있는 주체들인데, 그런 실패 하고 실수할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내가 모르는 은서가 되어가는 중
은서가 지원주택에 입주하고 둘째 날까지 함께 잤어요. 그리고 셋째 날은 은서 씻기고 혼자 놔두고 나가는데 너무 무서운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은서가 저기서 사고 안 치고 잘 살 수 있을까 그랬죠. 근데 잘 사는 거예요. 시도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예요. 내가 보는 이 사람의 모습과 이 사람이 나에게 보여주지 않는 모습이 되게 많잖아요. 은서는 점점 미니멀리스트가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여전히 은서에게 도라에몽, 고래 인형 안겨주면 은서는 옷장에 다 처박아두더라고요. “고래는 뺏어. 이제 고래 집어넣어” 유튜브로 같이 ‘뽀로로’ 보자고 하면 잠깐 보다가 ‘진짜 사나이’ 틀고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러면 조금 섭섭하긴 해요.
내년 8월이면 캐나다로 돌아가요. 그 전에 은서랑 베트남으로 여행을 가는 게 가장 큰 계획이죠. 아마 공공일자리 재계약 되는 게 관건인 것 같아요. 그게 안 되면 또 뭔가를 찾아봐야겠죠. 은서가 뭘 좋아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