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이야기]

발바닥, 기억에 기록을 더하다(8)

  • 2016.06.02 12:2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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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 기억에 기록을 더하다

                              (8)

 발행일 : 2016.6.2(목)

발행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발바닥, 기억에 기록을 더하다(8)

– 2005년 사회변혁을 꿈꾸는 사람들, ‘사변사’의 탄생

       
           
       

 

장판 질량 보존의 법칙 

<장애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장애운동 판’을 줄여 “장판”이라고 부르곤 한다>

 

   2005년 5월 6일 봄기운이 흐드러지게 내려앉은 날, 우리는 인사동의 한 주점에 모였다. 옥순, 소연, 준민, 숙경, 정하, 이렇게 다섯은 전에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이하 ‘장애우연구소’)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료였고 선후배들이었다. 다섯은 각자의 이유들로 장애우연구소를 그만둔다 했고, 이후 각자 다른 계획과 꿈이 있었다. 환경운동을 하고 싶은 사람, 인권운동을 하고 싶은 사람,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 그냥 좀 쉬고 싶은 사람...... 그렇게 서로 가려는 길을 안주삼아 막걸리나 한잔 하자고 했다.

 

   그러나 술자리를 제안한 옥순에게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평소 ‘태평양’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던 옥순은 후배들의 힘들다는 투정을 태평양 같은 넓은 마음으로 다 들어준다. 그리곤 ‘그러니까 나랑 함께 더 잘해보자’며 의기투합으로 술자리를 정리하곤 했다. 그렇게 장애운동에 자신의 청춘을 보낸 옥순이었다. 그런 옥순이 술자리를 제안할 때 우리는 이미 짐작했어야 했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각자 어떤 인생 계획이 있는지 들은 옥순은,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바로 “장판 질량 보존의 법칙”이었다. “너희들이 무얼 하자고 해도 내가 다 같이 할 테니 오직 장판 만 떠나지 말아 달라.”

 

   참 이상했다. 아직 장판과 헤어질 때가 되지 않은 걸까, 각자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다른 길을 가겠노라 뛰쳐나온 사람들이 어느새 장판의 정세와 흐름을 분석하고 문제점을 성토하고 있었다. 누구는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서 장애담론서를 매달 발간하자고 했다. 담론이 필요한 시대라 했다. 누구는 조직이고 뭐고 필요 없고 장애운동을 넘어서서 이 사회를 변혁하는 운동에 개인들의 이름으로 연대하자고 했다. 이놈의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장판만 바꿔서 되겠느냐고 열을 올렸다. 우리가 이 사회를 열 두번 쯤 변혁시켰다가 제자리로 돌려놓았을 때, 우리는 이미 취해 있었다. 옥순의 장판 질량의 법칙은 그렇게 지켜졌다. 그리고 조직하나가 탄생하려고 이제 막 꿈틀거리고 있었다.

 

일단 시작하자, 우리가 무엇으로 불리든

 

   그러나 생각해 보면 참 대책 없는 사람들이었다. 사무실은커녕 사무기기도 없고 돈도 없었다. 대단한 기부자가 있거나 누구하나 벼락부자인 사람도 없었다. 그저 그날 먹은 막걸리 값을 나눌 정도였던 우리는 당장 모일 회의장소도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신이 나서 새롭게 조직을 만들자, 조직이름을 정하자, 누군가 대표를 해야 한다, 하고 싶은 주제를 토론하자, 조직 문화가 중요하다며 만리장성을 몇 번이고 쌓았다. 사실 우리에겐 오직 하고 싶은 운동의 주제와 사람만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인사동에서 이뤄진 ‘취중결의’는 다섯 모두를 하나로 묶기에 충분했다. 조직이름도 정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먼저 대표를 뽑아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언제나 최고의 민주주의적 방식은 ‘제비뽑기’라는 준민의 주장에 따라 우리의 첫 대표선출은 젓가락 제비뽑기로 진행됐다.

 

   “내가 뽑았네, 나 사실은 내가 하고 싶었어.”

   발갛게 상기된 얼굴에 사슴 같은 눈망울(준민의 눈을 보고 누군가 그렇게 표현했다)로 준민은 결의를 밝혔다. 당시 같은 초현실적 상황에서는 우리 다섯 중에 가장 초현실주의자였던 준민이 우리의 대표에 적격이었다. 우리는 일단 정기적인 모임과 얹혀 살 공간을 알아보기로 했다. 가진 돈도 좀 모아보자고 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으로 불리든, 일단 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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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2007년, 홍성풀무학교. 발바닥활동가들과 초창기 회원들이 함께 간 들살이.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seamos todos nosotros realistas).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pero tengamos un sueno imposible en nuestro corazon).” 체게바라의 말처럼, 우리는 불가능한 꿈을 그렇게 현실로 만들고자 했다.]

 

       
           
       
       
           
       

‘사변사’의 탄생과 탈시설운동

 

   그렇게 조직결성을 결의하고 무언가 추진하려고 하자, 재정을 마련할 계획이 필요했고 통장이 필요했다. 통장을 개설하려고 보니 뭔가 이름이 있어야 했다. 조직의 정식 명칭은 다시 정하더라도 당장 개설할 통장명이 필요했다. 우리를 설명할 어떤 글도 있어야겠는데, 거기에 뭐라고 이름이 들어가야 했다. 정식 이름을 정하기까지 우리는 ‘사회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을 줄여 ‘사변사’로 부르기로 했다. 우리가 했던 수없는 토론의 결론은 ‘변혁’이었고, 장애인복지를, 사회복지를, 나아가 우리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 우리활동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은행 직원은 통장 명을 사변사로 해달라고 하니 몇 번이고 다시 물었다. 뭐라구요?

 

   꿈과 현실 사이의 이야기를 오가며, 수많은 운동의 주제들이 안주거리가 되어 어느 봄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중에서 우리는 먼저 ‘탈시설 운동’으로 마음을 모았다. 그 당시 미신고, 신고시설 할 것 없이 장애인시설에서의 인권문제는 연일 터져 나왔고 우리는 ‘시설공대위’의 이름으로 시설인권운동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설인권은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애당초 알고 있었다. 인권문제가 터지면 장애인을 다른 시설로 옮겨놓고는 자기책임을 다했노라 말하는 정부, 시설과 시설 안에서 평생을 뺑뺑이 돌아야 하는 장애인의 삶, 이건 아니었다. “시설 안에서 인권을 찾을 수 없다, 그들이 나와서 자립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당시 탈시설운동 ‘만’을 하는 단체는 없었다. ‘탈시설’을 주제로 운동단체를 만든다는 것이 가능할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장애가족이나 시민들로부터도 지지받기 힘든 주제였다. 그러나 우리가 본 것, 우리가 만난 사람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손을 잡고 시설의 벽을 넘고 싶은 마음, 그 마음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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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1960년대 한창 일본의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에 사이또 겐조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대학 1학년때 우연히 시설로 자원봉사활동을 나가게 됐고, 시설안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들인데, 왜 격리되서 살고 있지? 학생운동에 열을 올렸던 사이또 겐조는 사회운동이 장애인의 삶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작 대학 1학년에 불과했던 그와 동료들은 리어커를 구해 시설에서 나오기를 희망하는 장애인을 태우고 시설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자립해서 살려면 노동하고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는 사회가 된다고 생각한 그는 지금의 왓빠(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일하는 빵공장)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리어커로 장애인을 탈시설 시킨 열아홉의 사이또 겐조는 발바닥이 너무너무 흠모하는 사람이다. 이제 60대가 된 그는 <장애인 차별과 싸우는 전국공동체연합> 사무국장으로 지금도 왕성히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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