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10.11 23: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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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에서 주관한
<형제복지원 피해자 증언대회>는 약 6-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차분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치뤄졌습니다.

처음 발언 하신 오민철(가명)님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라고 말문을 열며
"아무 의미없는 나날을 보냈다"고 깊은 한 숨을 내쉬었습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참석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발언하기 시작했고 문제를 드러내 뭔가 일을 만들어내려면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참여했다고 하십니다.
"인간이 해서는 안될 짓이었고 죄를 지어 들어간 것도 없는데 감금당한 것이 억울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점점 말을 잇지 못하더니
"잠깐 쉬고 나중에 하겠다"고 하셨죠.
고통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 고통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삶을 살았던 그였기에 너무 힘겨웠나 봅니다.

이상우(가명)님은 끝내 참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는 중이라고 하셨는데...좀 힘겨우셨는지, 결국 되돌아가셨습니다.
나중에는 한번 보자고 전화는 주시더라구요^^

양세환님은 "본인의 눈에 살기가 가득하지 않냐?고 물으며
"원래는 차분한 성격이었지만 형제원에서 매를 많이 맞아 성격이 포악해진 것 같다"며
가장 중요한 성장시기 폭력과 부당한 권력행사에 노출된 것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이상철님은 "기억하고 싶지 않고 감추고 싶다"며 "부산시와 국가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본인이 부끄러워하는 만큼, 국가와 부산시도 부끄럽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 식으로 운영해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당시 '시대'가 어쩔 수 없었다면, 지금은 그게 아니니
지금이라도 진실을 규명해 국가가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의무소대에서 관 나르는 일을 했다며,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지만, 아파도 제대로 된 약 처방 하나 없고
매일 폭력에 시달렸기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는 지금이라도...[추모관]이나 [추모비]를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도 해주셨습니다.
기약없는 수용소...그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며, 단지 '탈출'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제대로 학교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늘 노력해왔고, 그래서
지금은 열심히 살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
이 자리에는 실종자 가족도 오셨습니다.
81년도인가? 형이 퇴근 후 돌아오지 않았는데 87년 폐쐐된 후 마을에 있는 사람이
형을 형제복지원에서 봤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실종신고를 하고 파출소를 다니고 형제복지원에도 찾아갔지만
"그런 사람 없다"는 말만 들어 부모님이 그냥 돌아오실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최근 4-5년전부터는 큰형님의 제사도 치루고 있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끝까지 형이 돌아올 것이라며 아직도 여전히 30년 전 그 집에 살고 계시답니다.

형제복지지원재단에서 운영하는 딸랑 하나인 시설
<실로암의 집>에서 20여년을 살고, 최근 한 달전에 탈시설한 두 분도 멀리 부산에서 오셨습니다.
지금은 체홈홈에서 살고 계시는데, 그 분들은
"박인근은 악마"라며, "직원들도 때리고 반말 하는 것을 봤다"며 지금도 무섭다고 전했습니다.
죽어가는 거주인에게 "죽도록 내버려 둬!!"라고 말했는데,
87년 사건이 터지고 감옥에 갔다왔어도 박인근은 변한 게 하나도 없고 억울해한다고 했습니다.

***
어제 내용이 경향신문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0102231585&code=940202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14777
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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