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이야기]

[탈시설 사회를 바라는 가족 증언대회] 우리 주희, 대학로에 있어! - 최정식

  • 2024.04.25 08:5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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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시설 사회를 바라는 가족 증언대회] 


우리 주희, 대학로에 있어! - 최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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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은 최자 정자 식자. 연령은 용띠 만으로는 70이에요. 주희는 출생신고를 1년 늦게 했어. 지금 42일 거야. 만으로 하면 40이겠다. 돼지띠. 내가 우리 주희는 서른여섯에 임신해서 낳았는데 난산이었어요. 집으로 왔는데 아이가 젖을 못 먹었어. 그래서 적십자 병원에 갔는데 인큐베이터에 들어가게 된 거지. 당시에 인큐베이터 비용이 하루에 10만 원이니까 엄청 큰돈이었지. 어느 날은 의사가 살기가 어렵겠다고 했는데, 기적적으로 살아났어요. 살아도 매일 병원으로 출근을 했지.

 

받아만 주세요

 

차츰 자라면서는 걷지를 못하니까 유명한 소아과도 다니고 병원 여기저기를 다녔어요. 그때는 못 걸으니까 명일동에 있는 재활원을 다녔어. 재활원에 가서 내가 여러 가지 배워와서 집에서 애를 재활시켰어요. 당시만 하더라도 집 생활이 어려우니까 집도 조그맣고 보통 침대가 없잖아요. 그렇다고 병원에 있는 침대를 내가 사올 수도 없고. 그래도 집에서 내가 이것저것 다했다고. 나중엔 말을 하게 하려고 언어 가르치는 곳에 많이 보냈어요. 복지관도 그렇고. 그래도 말은 안 되더라고.

 

동네 미술학원에도 몇 개를 넣어보기도 했었어요. 나는 비장애인 애들하고 좀 어울려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거든. “선생님, 내가 수고비를 더 드릴 테니까 좀 받아만 주세요.” 그랬지. 어느 날 선생님이 상담하자고 해서 갔더니, 다른 학부형들이 안 된다고 항의가 들어온대. 그 당시에 화가 나더라고. 그래도 내가 죄송하다고 하고 다시 데리고 왔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루는 버스를 탔을 때 트러블이 있었어. 통근 치료 다닐 때인데, 주희가 버스에서 뭘 잡느라 어떤 언니 손에 손을 올렸는데 탁 치는 거야. 내가 그걸 보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또 화가 막 나더라고. “학생, 얘가 벌레야? 왜 그렇게 손을 떼. 얘도 사람이야그랬어. 그 사람도 어려서 그랬던 건데.. 몰라. 그땐 내가 그런 말도 했었어요.

 

또 한 번은 겨울에 식당에서 볶음밥을 먹고 나왔는데 체한 거야. 버스에서 주희가 토를 한 거야. 밥알이 하나 튀었어. 내가 막 죄송하다고 그러면서 휴지를 꺼내서 줬어. 그랬더니 이거 지금 드라이해서 입고 온 건데하면서 막 그러는 거야. 그래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드라이비 드릴게요.” 그랬더니 궁시렁궁시렁 대다가 내렸어. 근데 있잖아. 버스 기사가 나한테 어머니, 그렇게 미안해하실 거 없어요. 버스에서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걸 가지고 그 사람이 그런 게 잘못된 거지.” 기사가 나를 응원하더라고.

 

엄청 예뻤어, 주희가

 

제가 동대문에서 옷 장사를 했어요. 그러면서 우리 주희 학교도 데리고 다니고, 우리 아저씨가 차로 태워다 주고 학교 앞에서 대기하다 데려오고 그렇게 생활을 한 거야. 그런데 애가 학교 갔다 오면 집에 사람이 있어야 되잖아. 집에 사람을 하나 둬야 하니까 돈도 무지하게 썼지. 당시에 진짜 힘들었어요. 번 돈이 다 애한테 들어갔지. 나는 내 자식이니까 돈 쓴다는 걸 모르는데, 옆에서 그 돈이면 빌딩 하나 했을 거라고 한마디씩 했죠. 근데 엄청 예뻤어, 주희가. 그래서 우리 애 보라고 내가 데리고 다녔지. 그러면 사람들도 그랬어. 너무 예쁘다고.

 

아이가 장애가 있으니까 여기저기 막 싸돌아다녔어요. 그래서 유치원서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까지 다 졸업했어요. 그런데 학교에 결핵이 돌았나봐. 여럿이 막 있다 보니까 결핵에 걸린 적이 있어요. 처음에는 막 기침도 하고, 몸에서 열이 막 나는데 동네 병원을 가도 안 낫는 거야. 그래서 삼육병원에 갔더니 결핵으로 나와서 1인실에 저하고 열흘 동안 입원했지. 그 뒤부터는 집에 계속 있었어. 5년 정도.

 

몇 등급을 드릴까요?

 

그때는 장애인 지원제도라는 게 없었어요. 장애등록도 애가 엄청 커서야 했어요. 제가 집에 없고 우리 아저씨만 있을 때 통장이 왔었대요. 근데 우리 애를 보니까 조금 달라 보이는 거지. 통장이 장애인 신청을 하셨나요?” 그러기에 어떻게 신청하냐고 물어보니 동사무소 가서 신청하래. 그래서 그때 가서야 신청했지. 뭘 내라고 해서 경희대로 갔어.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장애등급을 몰랐어. 의사가 그러더라고. “몇 등급을 드릴까요? 1등급 드릴까요? 2등급 드릴까요?” 이래. 난 뭐가 좋은 줄도 모르고 “2등급 주세요.” 그랬지. 그랬더니 1등급이 혜택이 더 좋다는 거야. 몰랐지. 아무것도 몰랐어, 나는.

 

송전원이라는 곳이 있대

 

주희 학교 다닐 때, 같이 다니던 어떤 엄마는 애를 가평에 있는 시설에 데려다 놨대. 그러면서 나보고도 생각을 해보라는 거야. 그때 난 못한다고 그랬지. 주희를 다른데 갖다 놓고 어떻게 잠을 자냐, 난 못한다고. 나는 절대 못한다고 그랬어요.

 

그러다 어느 날, 애 아빠랑 나랑 주희를 집에 두고 나갔다 왔어. 그런데 들어가려 했더니 문이 잠긴 거야. 누가 와서 아마 벨을 눌렀던 것 같아. 얘가 아는 사람은 열어줘요. 근데 가서 얼쩡얼쩡하다가 보조키를 눌러버린 거지. 그러니까 우리가 바깥에서 열쇠를 하니까 안 열리는 거야. 우리집이 6층이거든. 그래서 사다리차를 불러서 사다리 아저씨가 집에 들어가서 문을 열어준 거지. 아저씨가 들어갈 거니까 놀랄까봐 주희야, 주희야, 놀라지 마.” 그랬지. 모르는 사람이 집에 탁 들어오면 놀랄 수도 있잖아.

 

그리고 그다음 날 우리 아저씨가 모임이 있었어. 아빠 친구들이니까 야 주희는 잘 있냐?” 그랬더니 우리 아저씨가 어제 주희가 문을 잠가가지고 사다리차 불러서 문 열고 들어갔다.” 했던 거야. 그때 누가 송전원이라는 곳이 있대. 그분이 자기 아는 사람 애가 또 다른 시설 가서 있다고. 송전원이 공기가 엄청 좋으니깐 가보라고 한 거지. 그래서 송전원으로 가게 된 거야. 지금은 그 사람하고는 통화가 안 돼. 그 사람하고 아이는 어떻게 됐는지 연락이 안 되네.

 

갈 곳이 없잖아

 

그래서 옷을 조금 싸가지고 애를 데리고 송전원에 갔지. 면접도 보고 다 했지. 그랬더니 한 일주일 그냥 한 번 두고 가보세요.”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또 이제 한 일주일 있다 옷을 싸가지고 갔지. 근데 애가 적응을 못 했어. 다른 애들이 막 몸을 다 꼬집어 놓고 그랬어. 근데 그때 저도 말을 안 했어요. 당시에 나도 다시 데리고 오면 또 어디 갈 곳이 없잖아. ‘나도 힘들다하면서 송전원에 뒀지. 그렇게 한 두 달, 석 달 되니까 적응이 되더라고. 달달이 송전원에 방문했어요. 막 과일 싸 가지고, 애들 먹을 거 챙겨서 달달이 갔어요.

 

나도 주희 목욕시킬 때 말 안 들으면 왜 이러냐고 욕도 하고 막 그랬어. 나도 이러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안 그러겠냐고. 만약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두려웠어. 시설에 맡기고 나서도 집에 오면 목욕탕을 데리고 갔지. 그러면 어디 멍이라도 있나 살펴보게 되더라고.

 

그래도 송전원에 주희를 보내놓고는 내 활동을 할 수 있었어요. 활동이 뭐냐 하면 시간 보내고 놀러 다니는 거. 그때 내 나이가 50이었어. 그전에는 아무것도 못했어요. 주희 서른까지는.

 

난 안간다고 엄청 싸웠어요

 

그렇게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폐쇄를 한 대. 송전원에 폭행이 있었잖아. 그래서 저도 (가족대책위에) 많이 불려 다녔어요. 제가 또 구청, 시청으로 막 뛰어갔어요. 같이 막으러 가자더니 나 혼자 갔어. 혼자 시청에 들어가서 나 여기 온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무슨 폐쇄냐.” 그랬더니 안 된대. 그때 폭행 사건도 있고, 장애인들 받는 장애수당 문제도 있어가지고.

 

지금 인강원 국장님, 당시 송전원에 폐쇄할 때 원장으로 왔다가 지금은 인강원 국장이야. 김재원 국장님하고 엄청 싸웠어. 그래도 결국 폐쇄되고 이제 인강원으로 왔는데 또 적응이 힘들지. 근데 또 한 달, 두 달 가니까 괜찮더라고요.

 

그러다가 또 이제 노들로 가래. 주희 씨가 꼭 여기에 있어야겠느냐고. 난 안 간다고 그랬어. 여기 왔으니까 그냥 여기서 있어야지. 인강원에 와서 이제야 적응됐는데, 나 송전원에서 인강원 온 것도 참 힘든데, 여기서 또 왜 다른 곳으로 가라 그러냐. 난 안 간다고 국장님하고 엄청 싸웠어. 국장님은 어머니, 한 번만 가봐요. 가봐.”하고 나는 안 가요.”했지.

 

어머니, 나가면 더 좋아요

 

처음엔 왜 자꾸 주희를 내보내려고 그러느냐고 했어. “원장님, 왜 자꾸 주희를 보내요. 주희가 뭐 잘못한 거 있나요? 제가 뭐 잘못한 거 있나요?” 그랬어. 근데 아니에요, 어머니. 나가면 더 좋아요, 더 좋아.”하더라고. 나는 이걸 이제야 느낀 거지.

 

한번은 내가 무슨 인강원에 무슨 행사가 있어서 갔어. 근데 주희가 야학에 가야 하는 시간인가봐. 주희도 밥 먹고는 막 벌써 못 갈아입혀 달라고 하고, 양치질하고, 벌써 차에 타서 기다리더라고. 그래서 주희야 너 어디 가려고?” 했더니 막 간다는 거야. 야학 가는 게 좋아 가지고. 그래서 애 아빠가 어딜 가냐고 하니까 김재원 국장님이 노들 간다고 말하더라고요. 계속 집단생활하고 그 안에서만 지내니까 그게 너무 힘들어서 그랬나봐. 그러니까 인강원에서도 사회활동도 연결하고. 한 번은 노들장애인야학에 왔었어요. 한번 오라고 해서 와봤어. 막 주희가 율동하고 수업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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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이니까 좋아

 

여기 와보니까 일단 좋아. 와보니까 자립주택은 (활동지원사) 선생님이 1:1이잖아. 시설은 방 하나에 다섯, 여섯이지. 선생님 1명이 다 그 아이들 돌보려면 얼마나 힘이 들어요. 근데 여긴 1:1이니까 나는 그게 좋더라고. 지난번에는 내가 김치 담아 가서 선생님들하고 같이 밥 먹었어. 그날 보니까 우리 주희가 가운데 와서 앉는 거야. 원래는 우리집에 와서도 화장실 문 앞에 가서 앉아있어. 사람을 많이 접촉하지 않으려 했었거든. 그러니까 많이 변화됐네 싶더라고.

 

잘 왔다 싶어요. 주희를 얼른 이런 데(자립적 환경)로 보냈어야 했는데. 내 생각만 한 거지. 지금은 김재원 국장님한테 감사해요. 노들이 좋다는 걸 나는 뭣도 모르고 그냥 안 가려고만 했잖아. 송전원부터 인강원까지 있으면서 이제 친분이 생겨서 대화도 편안하게 하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정들었지.

 

편안해요 이제

 

자립주택도 처음에는 한 셋이서 같이 살잖아요. 그래도 처음에는 마음이 불안하더라고. 그런데 또 가서 보면 주희가 잘 하고, 좋아하고 하더라고요. 원래 자립주택 사는 게 4년이라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2년으로 바뀌었다 그러더라고. 그래도 지금은 4년째 들어가요. 지금 이제 다른 건 임대주택 선정되는 게 남았어요.

 

처음에 힘들었던 건 활동지원사였어. 안 해도 될 소리를 과격하게 했던 것 같아. 어느 날은 막 우리 주희가 울어. 전화를 해서 왜 그러냐고 했는데 모른대. 그 선생님 때문이었던 것 같아. 그러고 그만두더라고. 그때 좀 애로가 있었는데 그렇다고 다시 인강원에 보내야겠다 생각한 건 아니야.

 

우리 주희가 오빠랑 언니가 하나씩 있고, 삼남매야. 엄청 사랑하지. 애 언니도 그렇고, 우리 아들도, 애 아빠도 다 노들 자립생활주택에 와서 같이 봤어. 근데 지금도 불안해는 하지, 애들이. 엄마, 주희 잘 있냐고 해서 나는 잘 있다. 이제 걱정하지 말아라.’ 그러지. 너무 편안해. 편안해요.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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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라고 해도 함부로 대하면 안 돼요

 

지금 우리 주희가 집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아니잖아. 일자리도 있고, 활동을 하잖아요. 나는 그게 좋다는 거야. 처음엔 의문스럽다고 생각했지. “얘가 뭘 해서 돈을 벌어요?” 근데 돈도 번대. 일하면서 돈을 번대.

 

작년에 세종문화회관에도 갔지. 우리 주희가 어떤 선생님하고 춤도 추고 아주 신났더라고. 그때 내가 아는 언니 한 명하고, 우리 딸하고, 우리 애 아빠하고 다 데려갔어. 뒤에서 봤지. 우리 보면은 또 안 할까봐. 살살 뒤에서 봤어. 근데 주희도 우릴 봤어. 그럼 또 가만히 있다가 또 조금 있으면 아는 척도 하다가 춤도 추다가. 내가 그것만 봐도 많이 변화됐구나.’ 싶었죠.

 

여기 선생님들도 참 좋아. 내가 에이, 주희가 뭘 해요.” 이러면 막 아니라고 어머니, 주희 씨라고 해야죠. 어머니가 내 아이라고 해도 함부로 대하면 안 돼요.” 그래. 감사하지 난. 그렇게 말해주니 감사해요. 그래서 나도 말하는 걸 고쳤지. 우리 선생님들 덕분에 내가 집에 가면서 생각하는 게 많아. 내가 나이가 이렇게 먹었어도 배울 점이 많구나 싶어.

 

또 여기 오래도록 있으면 좋겠는 게, 내가 사는 집에서 버스가 한 번에 와. 그러니까 내가 사는 데에서 버스만 한번 타고 오면 되잖아. 그래서 편안하고 좋아요.

 

1년만 더 빨리 나왔다면

 

주희가 자립하면서는 수급자가 됐어요. 송전원에 처음 갈 때도 수급자가 아니니까 돈(실비입소료) 내고 다녔어. 인강원에도 계속 돈 냈지. 나는 그냥 수급자가 뭔지도 모르고, 내가 누구한테 도움을 받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난 아무것도 몰라. 이제야 알았지. 그래서 내가 다른 엄마한테도 이런 얘기를 해주지. “여기 노들 와보니까 너무 좋다.”

 

인강원에서 우리 주희처럼 자립해서 나온 사람도 있고, 못 나온 사람도 있어. 그래도 많이들 나오셨지. 인강원에 가보니까 참 오래 있는 애들이 있더라고. 막 유치원, 초등부서부터 있는 애들이 많이 있더라고. 부모끼리 통화를 하잖아. 주희는 가서 잘 있느냐고 그러면 나는 잘 있다고 그래. 노들 자립주택에 같이 오고 싶어 하는 엄마도 하나 있어. 근데 아직 안 되나 봐. 나도 국장님한테 얘기를 했는데, 아직까지 인강원에서 못 나가고 있는 것 같아.

 

나는 1년만 더 빨리 나왔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 옛날부터 봐왔던 엄마들도 만나면 내가 그러거든. “나 여기 온 거 너무 잘했어. 잘왔어지금은 저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 주희 덕분에

 

저는 남의 시선이 굉장히 두려웠어요. 나는 내가 책임을 져야 된다고 생각했어. 엄청 힘들었어. 근데 이런 얘기를 누구하고 해. 내가 낳은 새끼인데. 근데 떼어놓고 보니까 내가 애를 함부로 대했던 게 후회가 돼. 그냥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말을 잘못하면 속이 상하더라고. ‘내가 죄인이다생각했지. 내 생활이 편치 않으니까 더 그랬던 것 같아.

 

지금은 여유롭고 편안해요. 비장애인 엄마들 만나면, 자기 아이들 자랑하잖아요. 주희가 40이니까 다른 비장애인 애들은 다 결혼해서 살지. 그럴 때 나는 할 말이 없어. 나도 주희가 공부하고, 결혼생활도 하고, 애기도 낳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도 했었어. 당연히 내가 부모인데 그런 생각 하지. 근데 이제는 그런 거 없어.

 

지금은 그렇게 생각해요. 오늘도 나를 불러준 거잖아요. 우리 주희가 있으니까 내가 이런데도 와보는 거지. 주희가 아니면 즐거운 마음으로 선생님과 이야기 나눌 것도 없잖아. 내가 우리 딸한테 엄마 주희 때문에 인터뷰하러 간다.” 했더니 엄마 잘 하고 와.” 그러더라고.

  

내가 자신있게 말해

 

주희는 여기서 즐겁게 살면 좋겠어. 옛날에 송전원은 산이었잖아. 인강원도 산 쪽으로 들어가야 되고. 근데 여기는 번화가야. 우리집에서도 한 번에 차 타고 오잖아. 그래서 누가 우리 주희 어딨냐고 물어보면 내가 아주 자신 있게 말해. “대학로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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