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이야기]

[탈시설 사회를 바라는 가족 증언대회] 아이도, 나도, 남편도 각자 독립된 주체로 - 김수정

  • 2024.04.25 08:2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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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시설 사회를 바라는 가족 증언대회: 동네에서 계속 살고 싶습니다.]


아이도, 나도, 남편도 각자 독립된 주체로 - 김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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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김수정이에요. 올해 만 55세네요. 우리 남편하고 아들, 강아지와 넷이 살고 있고요. 원래 본업은 음식점 사장이에요. 우리 아들은 뇌병변과 자폐성 장애, 시각 장애 세 가지 장애를 갖고 있는, 그리고 하루하루 매일 신나게 살고 있는, 올해로 27세인 청년입니다.

 

어렵게 만난 귀한 아이

 

저는 여러 번 유산 끝에 지금 아이를 어렵게 가졌어요. 7개월이 채 되지 않아 조산한 2.21kg의 미숙아였어요. 생사의 고비도 여러 차례 넘기고 병원 생활을 오래 했죠. 그래도 덤덤했어요. 일찍이 조산기가 있어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의사가 굉장히 솔직하게 말해줬어요. 지금 조산하면 아이의 몸무게가 너무 작아 생존 확률이 적고, 출산억제제를 맞아가며 임신을 길게 유지하면 아이 생존율은 높아지지만 뇌병변 장애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해줬어요. 낳아보니 예견대로 뇌병변 장애가 있었죠. 퇴원하자마자 각종 치료가 시작됐어요. 그러다 아이가 자라면서 일반적인 뇌병변 장애가 있는 아이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고, 자폐성 장애를 진단 받았습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운동

 

제가 아무래도 부모연대 활동을 하다 보니 언론 인터뷰 할 기회가 많아요. 그런데 일부 기자들은 저를 헌신하는 부모로 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진짜 놀기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 , 지금이 좋은 사람이에요. 안정보다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활동을 되게 좋아해요. 물론 아이와 함께 살기 위해 사회를 바꿔내려고 부모 운동을 하는 것도 맞긴 하지만, 무언갈 다이나믹하게 만들어내는 역동성이 더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제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여서 했던거죠. 우리 가족이 성향이 비슷하구나 싶어요. 큰 언니도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을 열렬히 했는데, 자기 대학 다닐 때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연극도 같이 보고 그랬어요. 내가 또 글씨를 잘 썼거든. 그래서 플랑 글씨 써주고, 유인물 같이 만드는 작업들을 많이 했어요.

 

머리를 깎아서 바뀐다면 해야지

 

엄마, 아빠도 사회에 순응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특히 우리 엄마가 그 특유의 억척스러운 한국의 어머니상이면서도 늘 자기 주체성이 강했어요. 그런 엄마의 영향도 컸던 것 같아요. 2018 년도에 청와대 앞에서 209명이 삭발식 할 때 일부러 엄마한테는 얘기 안 했어요. 혹시라도 마음 아파하실까봐. 그 뒤로는 머리가 너무 짧으니까 한동안 안 가고 있었는데, 하루는 우리 남편이 엄마를 만나고 오더니 그러는 거야. ‘엄마가 너 머리 자른 거 다 알더라. 뉴스에서 봤대하면서 엄마가 미리 얘기했으면 나도 같이 있었을 텐데. 머리를 깎아서 바뀐다면 해야지. 나라도 했을 거야하셨더라고요. 우리 엄마가 그래요.

 

동현이는 조산아였기 때문에 신생아 중환자 집중 치료실에 85일을 있었어요.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수많은 고비를 겪어내고 집에 데리고 오던 날이 아직도 너무너무 생생하게 기억나요. 10분 거리를 1시간이 넘게 걸릴 정도로 눈이 정말 많이 왔던 날이었어요. 아이를 안고 데려오는데, 시어머니가 이러시더라고요. ‘애기야. 너 너무 고생했다. 엄마 뱃속에서 나오고 싶은데 못 나와서 얼마나 힘들었니. 얼마나 안기고 싶었니.’ 아이 입장에서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나는 워낙 내 위주의 생활을 해오던 사람이니까, 석 달간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거예요. 신선한 충격이었죠. 그날을 계기로 시어머니를 좋아하게 됐어요. 그 뒤로도 줄곧 동일한 태도예요. 남편 가족도 그렇고, 우리 가족도 장애가 있어서 안 됐다, 불쌍하다이런 얘기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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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니구나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 자라서 그런지 우리 아들도 장애가 있다고 특별히 안쓰러워하지 않았어요. 전혀 장애를 숨기거나 차별도 없었어요. 우리 남편도 막 유난인 사람은 아닌데, 내가 하는 활동을 지지할 것도, 반대할 것도 없이 그저 네가 선택한 거는 네가 해.’ 그런 사람이에요. 그래서 처음에 다른 장애자녀 어머니들을 만나면 너무 안타까울 때가 있었어요. 전에는 솔직히 제가 잘나서 당당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거든요. 점점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까, ‘지지 받는 환경 속에 갖게 된 자신감이지, 내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니구나.’ 겸손해지는 거죠.

 

그렇다고 아예 힘든 게 없었던 건 아니에요. 저는 원래 매일 새로운 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아이 낳고는 몇 년간은 아예 못 다녔거든요. 아이가 자폐인 특성상 강박이 심하고, 감각이 예민하니까, 어디 나가서 잠도 못 자고. 먹는 것도 극강의 편식이었거든요. 그래서 가족들이 모여도 나만 애를 데리고 다시 집에 가서 자곤 했는데, 그게 처음으로 슬프고 서러웠던 거예요. 그러던 아이가, 자라서는 지하철, 버스, 엘리베이터를 너무너무 좋아하게 된 거예요. 차를 태워서 슬슬 나가기 시작했는데, 관심도가 폭발하게 된 거죠. ‘이 도로로 가요.’, ‘저 도로로 가요하면서 계속 차를 타고 돌아다니자고 하는 거죠.

 

같이 살 수 있는 접점을 만들어가는 과정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또 특정 엘리베이터를 타자고 그래요. 예를 들면, ‘서울대병원 엘리베이터 타요그러는 거예요. 서울대 주차장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아주 오래된, 무려 골드 스타였는데 이렇게 자기가 관심 있는 엘리베이터 기종을 찾아서 막 돌아다니는 거예요. 어느 날은 목포까지 가서 해양사 박물관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자고 하더니. 타고 나서는 집에 바로 가자고 하는 거죠. 다른 날은 땅끝마을 해남 전망대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더니 집에 가자그러고. 딴 곳은 안 봐요. 오직 그 엘리베이터! 그렇다고 포기할 저도 아니었죠. ‘너 엘리베이터 타는 대신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야 돼.’, ‘이거 한 번 먹어야 다음에 대전 갈 수 있어.’ 하면서 점차 아이도 외박과 외식을 할 수 있게 됐어요. 같이 살 수 있는 접점을 만들어가는 이 과정이 정말 길었어요. 그렇게 아이도 점점 세상에 접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어요. 나도 덩달아 원래 좋아하던 돌아다니기를 같이 하게 된 거죠.

 

함께 만드는 삶의 기반

 

조금 지나서는 지하철로 옮겨갔어요. 근데 지하철은 말 그대로 지하잖아요. 지하철을 계속 타는데 나중에는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당시에는 활동지원사도 없던 때인데 남자 대학생에게 아르바이트로 이 아이와 지하철 같이 타기를 해달라고 했죠. 이 친구도 목적 없이 지하철 타는 건 힘드니까 같이 야구장을 간다든지 하면서 또 놀러가기의 세계가 더 넓어지더라고요. 징글징글했던 기억이 있어요. 지금은 ITX가 뚫렸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정동진까지 6시간 반이었어요. 정동진에 유명한 배 모양 리조트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기차타고 가면 역에 도착해서는 차가 없으니 이동할 수가 없잖아요. 그 다음부터는 딜을 했죠. ‘너는 정동진까지 기차 타고, 나는 내 차로 갈테니, 정동진에서 만나자.’ 그래서 정말 정동진역까지 아이는 기차 타고, 나는 차로 이동하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전국을 다 돌아다녔어요.

 

입맛은 또 얼마나 까다로웠게요. 물도 안 먹고 흰밥이랑 우유만 먹던 아이가 그다음에는 또 흰밥과 조기로만 2년을 살았어요. 한번은 우리 친정 식구들하고 처음으로 장거리로 놀러 갔는데. 아이가 밥을 안 먹고 계속 우유만 먹으면서 굶으니까 우리 엄마가 애가 탄 거죠. 그래서 영광으로 가자고 해서 영광 조기를 첫 끼로 먹이고, 조기를 더 사서 다른 식당에 한 마리만 구워달라고 사정사정해서 밥 먹였던 적도 있었어요. 지금은 동현이가 혼자 다니잖아요. 그런 경험들이 이 아이의 지금 기반이 된 것 같아요. ‘처음엔 싫더라도 나중엔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라는 걸 본인도 계속 반복되는 경험으로 쌓은 거죠.

 

말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

 

물론 혼자 다니는 데 사고도 있었죠. 하루는 동현이가 울면서 전화를 했어요. ‘왜 사람들이 저를 때리죠?’ 하면서 울었나, 소리를 질렀나. 그래서 남편이랑 나가봤어요. 집 근처니까 2호선을 한참 타고 다닐 때였죠. 찾아가 봤더니 맞아서 볼은 뻘겋고 안경이 다 망가졌더라고. 동현이는 굉장히 분노한 상태였죠. 들은 정보를 맞춰보니, 지하철에 물건 파는 사람들 있잖아요? 동현이가 어릴 때부터 전철 타면 그 물건 파는 소리를 좋아하면서 깔깔깔 웃었어요. 아마 그 아저씨는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해서 때렸던 것 같아요. 근데 동현이가 분노한 지점이 뭔지 알아요? 자기가 그런 일을 당할 때 옆에서 말려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동현이에게 상황을 다시 정리해 주고, 동현이가 요청한 대로 경찰서와 지하철 수사대에 신고 접수를 보는 앞에서 해줬어요.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는데, 아이의 분노 포인트는 그 누구도 아무 액션도 없다는 것이었어요.

 

그래도 동현이는 밖으로 나가겠다고 했어요

 

그 즈음에 동현이도 많이 힘들어서 트라우마 치료도 받았는데, 그때가 남편이 제게 처음으로 정색했던 날이에요. 맞고 들어온 다음날, 그래도 동현이는 밖으로 나가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난 내보냈죠. 남편은 내가 아이와 많은 시간도 보내기도 하고 정보도 더 많이 접하니까 나의 판단을 많이 존중해 줬는데, 아이가 밖에서 맞고 왔는데도 또 외출을 보낸 건 솔직히 이해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그때 그랬어요. ‘물론 상처도 있고 트라우마 치료도 받아야 하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자기가 나가겠다고 하지 않느냐.’, ‘내가 지금 아이를 막아버리면 이 아이는 평생 내가 데리고 다녀야 하냐.’ 지금 생각해도 잘한 결정인 것 같아요.

 

제가 아이한테 꾸준히 해온 얘기가 있어요. ‘친구가 꼭 필요하지는 않다.’고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혼자 여가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였어요. 다행히 아이가 혼자 다니는 걸 즐거워하기도 했고요. 제가 생각한 목표는 딱 이거 두 개였어요. 혼자 잘 놀고 잘 다니는 것과 건강. 나는 사실 교과서에서 이야기하는, ‘죽자 살자하는 친구가 실제로 존재할까?’ 생각해요. 지금 우리가 인터뷰하는 것처럼 마음이 맞으면 즐겁게 만나는 거고, 활동하면서 오래 만나는 사람이 결국 친구가 되는 거지 뭐.

 

부모가 직접 세팅해야 하는 통합교육

 

, 학교 다닐 때는 어땠냐고요? 학교생활이 결코 편하지는 않았어요. 어린이집만 하더라도, 그때는 서울에 통합교육하는 어린이집이 강남, 강동, 영등포 딱 3곳뿐이었어요. 이미 대기가 몇 년씩 있으니 갈 수가 없었죠. 그래서 동네 어린이집에 갔다가 일주일 만에 나오고, 다른 어린이집에서도 도저히 못 보겠다고 잘렸어요. 한번은 또 다른 어린이집에 갔더니 엄마가 같이 들어와야 한다고 했어요. 아이는 내 무릎 위에서 계속 울면서 집에 가자.’ 그러고 나도 하루 종일 내가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싶더라고요. 거기도 한 달만에 그만두고, 통합교육에 관심있다는 어린이집에 찾아가서 사비로 우리 아이를 치료하시던 선생님을 교사로 모시고 통합교육 세팅을 만들었어요. 지금까지도 그 어린이집은 계속 통합교육을 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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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시간

 

초등학교는 일반학교에 갈지 특수학교에 갈지 그다지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않았어요. 그냥 동네 집 앞 제일 가까운 곳에 보냈어요. 교장하고 면담하면서 아이 특성과 필요한 지원을 설명해 줬어요. 그때는 아이가 혼자서 잘 못걸어서 벽을 짚거나 누가 손을 잡아줘야 했거든요. 통합 교육이 쉽진 않았지만 그래도 교사나 같은 반 아이들이 잘 협조해줬어요. 근데 하루는 학교에 안 가고 싶어하더라고요. 알고 보니, 나나 담임에게는 우리 아이를 잘 도와주고 옹호해 주는 친구였는데, 정작 아이 입장에서는 간섭과 통제였더라고요. 아차 싶었어요. 내가 왜 우리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어쩌다보니 이 학교 저 학교를 여러 사정으로 돌아다니게 됐어요. 어떤 학교에서는 괴롭힘도 많이 당해서 힘들면 그만 둬도 된다라고 했는데도 끝까지 5년을 넘게 버티더라고요. 그 시간은 나도 버티는 시간이었어요. 힘든 환경이었지만 지지해 주는 몇 사람이 있어서 그 힘으로 버텼던 것 같아요. 아이도, 나도.

 

지역사회와 같이 쌓는 경험

 

지역사회와 쌍방의 경험이 중요해요. 지금 동현이가 하는 일이 1229일에 계약이 종료돼요. 우리 집 한량은 이날만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고 정보를 알려줬어요. 신청은 혼자 못할 줄 알았지만, 그래도 가서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해보라고 했죠. 정말 노동청에 한번 다녀오더니 자신감이 생겼더라고요. 관공서의 경험도 중요해요. 처음에는 제가 주민센터에 가서 서류 하나를 떼오라고 했어요. 그러면 주민센터에 도착해서 나한테 한 10번은 전화를 하는 거예요. ‘이거 어떻게 해야 돼요?’, ‘뭐라고 써야 돼요?’, ‘뭐라 말해야 돼요?’ 나도 주민센터에 따로 가서 정보를 알려주기도 했어요. 예를 들어, ‘다음에 우리 아이가 오면 정확하게 문장을 짧게 끊어서 물어봐 주세요.’ 이렇게요. 그랬더니 주민센터 담당자나 사회복지사도 경험이 같이 쌓이니까, 그 후부터는 나에게 전혀 연락 없이 알아서 잘 처리되더라고요. 물론 그렇게 되고 나니 나는 동현이가 무슨 서비스를 신청하고 있는지 몰라요(웃음)

  

내가 죽은 뒤에도

 

오랜 세월 같은 집에서 살면서 익숙해지는 게 있잖아요. 그래서 부모들도 나랑 같이 살던 이 집에 이 아이가 계속 살았으면 좋겠다는 분들도 있거든요. 나도 처음엔 살던 동네에서 계속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었어요. 평생 여기에 살아온 아이니까. 동현이도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그래요. 근데 뭐, 어떻게 평생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겠어요. 집 관리나 여러 가지 조건상 사실은 불가해요. 그리고 그 조건들은 내가 죽은 뒤에도 유지될 수는 없잖아요. 그렇게 생각해 보니, 본인에게 괜찮은 환경을 골라보라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요즘 세상 워낙 험하니까 후미지지 않고 큰 길가면 좋겠다는 생각정도만 하고 있어요.

 

제가 있는 종로지회에서도 간담회를 한 적이 있어요. 2~3명 정도 모여 살면 좋겠다는 분도 계시고, 자폐성 장애자녀를 둔 엄마들 모임에서는 셰어는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본인이 내는 소음도 있고 하루 2~3시간이야 괜찮지만 매일 같이 지내는 건 서로에게 힘들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정부가 시설을 11실로 바꾼다고 하는 건 1인 감옥이죠. 자녀의 장애가 중증인 분들은 지원주택에서 제공되는 서비스를 원하시고, 자녀가 조금 더 독립적인 분들은 금융, 위생, 주택 관리, 건강 관리 이 네 가지를 꼽으시는 것 같아요. 주택이나 위생은, 요즘 젊은 세대도 집안에 정말 간단한 것도 못 고치잖아요. 나부터도 어려워. 식사는 뭐 요즘 우리나라 워낙 밀키트나 배달이 잘 되니까 의외로 걱정이 없으시고요.

 

우리의 과제, 부양의무제 폐지

 

서울시가 추진하는 돌봄주거서비스를 알고 있긴 해요. 지금보다 더 확대한다고 하는데, 정작 그 서비스가 어떤 형식으로 제공되는지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부모들은 이 체계가 명확하게 구축되어 있지 않다는 불안감이 큰 것 같아요. 지금이야 내가 있는 동안에 어떤 지원이든 엮어줄 수 있겠지만 안정적이지는 않잖아요. 결국은 공적인 영역에서 일상에 필요한 지원서비스와 권익옹호 체계를 탄탄히 만들어 내는 게 우리의 과제죠.

 

,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시급한 과제요? 저는 부양의무제 폐지, 건강 관리, 행동 지원 이 세 가지예요. 부양의무자 기준을 푸는 게 제일 시급하죠. 자녀 독립을 지원할 여력이 있는 분들은 다 부양의무제에 걸리는 거예요. 아이 기초수급자격이 박탈되거나. 마지막으로 집을 물려주거나 마련해 주려 해도 증여세가 걸리고요. 풀어야 될 게 정말 산 넘어 산인 거예요. 아이에게 생계급여가 지급이 안 되면 부모가 생활비를 대야 되는데.. 지금 우리 세대의 노후도 너무나 길잖아요. 노후 준비가 미처 안 된 사람들도 꽤 많고, 더군다나 장애 가정은 빈곤한 가정들이 많고요. 나는 사실 애가 하나니까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가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또 비장애 자녀도 있고, 부모 본인이 아프기도 하고, 굉장히 시급한 문제예요.

 

지금 부모들도 나름대로 주거에 대해 여러 모색을 해보고 있어요. 이런 시도가 더 힘을 갖도록 내부에서 잘하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흔쾌히 동의하지는 못하는 그룹홈을 고민하는 분들도 계시고, 협동조합 형태로 주거서비스를 만드는 것도 있고요. 우선 지금은 재가장애인에 대한 주거서비스가 전무하다시피 하니까 여러 시도가 계속되면 좋겠어요. 흐름을 당장 바꿀 수는 없고, 결국은 경험이 쌓여야 전체적인 흐름이 바뀌어 가는 거니까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분명 이전보다 나아가고 있다고 믿어요.

 

각자 독립된 주체로 살아가는 거죠

 

최근 몇 년 간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정부가 연신 홍보를 해댔어요. 그런데 아직도 발달장애인들은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수준이에요. 아직도 부모들이 살기 힘들다고, 자식을 죽이고 본인도 죽는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데 왜 정부는 해결하려고 하지 않지? 나는 살면서 이 현실이 너무 창피해요. 우리는 언제까지나 슬픈 장애인의 엄마여야하는 걸까요? 그래도 우리 이야기를 들어줄까 말까 한 현실을 살고 있는 게 정말 창피해요.

 

노후준비요? 저는 우리 아들의 서른을 상상해요. 자주. 개인적인 목표는 동현이를 서른에 독립시킬 거라고 다짐해 왔었어요. 사실 아이가 스무 살 때만 하더라도 혼자 살 수 있을까?’ 걱정했었어요. 하지만 아이가 서른 넘어서까지 같이 있으면 나중에 아예 못 내보낼 것 같더라고요. 주변이 그래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부모님들이 본인 아플 때 돼서야 독립을 고민하니까 현실적으로 잘 안되더라고요. 한편으로는 나도 한동안은 혼자 살아보고 싶어요. 동현이도 이제는 독립을 받아들여요. 그래서 아이도 독립하고, 나도 혼자, 뭉치는 우리 남편하고 좀 각자 사는 걸 꿈꿔요. 각자 독립된 주체로 살아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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