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이야기]

발바닥, 기억에 기록을 더하다(10)

  • 2016.09.21 23:4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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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 기억에 기록을 더하다(10) 

발행일 : 2016.6.24(금)
발행 :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발바닥, 기억에 기록을 더하다> 전편은 발바닥행동 홈페이지에서 볼수 있습니다. 
       
           
   
       
           
   

2006년,  사변사에서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으로

       
           
   

 발바닥 이름도 짓기 전에 1호 회원이 생기다. 


  2005년에 이어 2006년 초까지도 <장애인생활시설 인권상황 실태조사>보고서를 마무리하느라고 야근, 야근, 야근...... 모든 연구자들이 각자의 맡은 부분을 써 내느라 인고의 시간을 보냈고, 조사와 실무의 책임을 맡고 있던 소연과 정하도 명동사무실에서 밤을 새우다 새벽녘이 되면 찜질방으로 가곤 했다. 그러는 사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안부와 걱정의 전화들이 이어졌다. 장애우연구소를 나가더니, 새로 취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시설조사 다닌다며 전보다 더 바쁜 척들을 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돈으로 생활하고 있는지, 끼니때 밥들은 챙겨먹는지, 일을 그만뒀으면 좀 쉬던지 할 것이지 만날 때마다 눈은 퀭 해가지고 다크써클이 턱까지 내려온 ‘이것들’을 걱정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그러면서도 뭐가 신났는지 만날 때 마다 시설이야기를 그렇게들 하는지...... 

  그러다 ‘이것들’을 걱정하는 사람 중 하나가 제발 통장이나 좀 만들라고 쪼기 시작했다. 쪼임 끝에 사변사 명의의 통장하나를 만들었는데 계좌를 틀자마자 <발바닥의 1호 회원>이 탄생했다. 정하의 대학선배 최치훈이었다. 최치훈회원은 1호 회원이면서 지금까지 10년이 넘도록 발바닥의 꾸준한 회원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런데 발바닥 1호 회원 자리를 뺏겨 안타까워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래서일까? 계좌를 열자마자 30여명의 사람들이 바로바로 회원가입을 했고, 그들은 지금까지도 발바닥의 열혈 회원들이다. 

“발은 여럿이 함께 만드는 삶의 현장입니다. - 신영복” 

  그렇게 기다렸다는 듯이 회원이 되어 준 사람들과 뭐라도 써서 가져오라는 사람들의 전화가 자주 왔다. 니들 이름이 뭐이든 간에, 회원가입서 같은 쪼가리라도 가져오라고. 세상에 이렇게 마음 이쁜 사람들이 많다니,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가! 그러나 출발을 위한 준비는 더디기만 했다. 

  우리는 일단 조직 이름을 정하기로 했다. 누구는 이름에 우리의 지향과 목적이 명확히 담겨야 한다고 했고, 누구는 딱딱하고 긴 이름은 싫다고 했다. 누구는 양심과 실천을 부르는 시대이므로 이름에 ‘행동’이 꼭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했고, 누구는 먼 미래를 생각해서 이름은 평이하게 짓는 게 좋다고도 했다. 우리는 논의하면서 ‘인권운동사랑방’의 이름을 참 부러워했다.  이름 지을 때는 ‘사랑방’이 뭐냐고 했을 법 하지만, 무겁지 않으면서 지향은 분명하고 친숙한 느낌이 부러웠다. 

  우리는 몇 번의 회의를 거듭하다가 더 이상은 미루지 말자는 마지막 회의에 각자 꼭 들어갈 단어들을 생각해 오기로 했다. 그 단어들을 들여다보면 묘안이 생기리라. 그러면서 나온 단어들이 ‘인권’, ‘장애’, ‘행동’ 그리고 ‘발바닥’이었다. 인권, 장애, 행동은 예상되는 단어였는데 돌연 ‘발바닥’이라니? 발바닥이라는 의견을 낸 준민은 신영복선생님의 글을 인용하면서 우리의 활동은 전문가의 테이블도 아니고, 허망하게 떠 있는 구호도 아니고 현장에 발 딛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장에서 실천으로 이어지는 힘, 그 힘으로 만들어보자고 했다. 그날따라 준민의 이야기가 왜그리 멋졌는지, 말하는 준민의 머리 뒤로 후광이 보이는 듯 했다. 그래, ‘발바닥’, 좋네 좋아. 근데 심각한 성명서 밑에 ‘발바닥’하고 쓰면 우스워 보이지 않을까? 발바닥, 발가락, 발꼬락...... 좀 웃기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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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 여행 
 

일생 동안의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머리 좋은 사람과 마음 좋은 사람의 차이, 
머리 아픈 사람과 마음 아픈 사람의 거리가 
그만큼 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이 남아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 그것입니다. 
발은 여럿이 함께 만드는 삶의 현장입니다. 
수많은 나무들이 공존하는 숲입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가슴에서 다시 발까지의 여행이 우리의 삶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만 못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발 좋은 사람만 못합니다. 

故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발바닥, 작명이 중요하다.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으로 이름을 정하고 나자, 꼼꼼한 소연이 검색을 해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같은 이름은 없었으나, 수원지역에서 ‘길바닥행동’으로 활동하는 그룹이 있었다. 1주일에 한번 수원역에 모여서 활동하는 모임이었다. 우리는 이들의 연락처를 거쳐 거쳐 알아본 후 양해를 구했다. 길바닥행동은 아니지만 발바닥행동으로 단체이름을 짓고자 한다고. 흔쾌한 동의와 응원의 메시지를 받으며, 드디어 <장애와 인권 발바닥 행동(약칭 ‘발바닥행동’)>으로 이름을 정했다. 2006년 4월이었다. 

  훗날 사람들은 발바닥이 시설비리 투쟁한다고, 탈시설 투쟁한다고 농성에 농성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더니, 역시 작명이 중요하다고들 했다. 발바닥에 땀나도록 현장에서 뛰겠다더니 이름처럼 됐네 라며 놀리기도 했다. 그랬다. 차라리 ‘발바닥농성’이라는 농성 전문업체를 차리라는 농담까지 오갔다. 의도한건 아니지만 발바닥의 초창기는 조직을 정비할 새도 없이 투쟁으로 시작됐다. 

마중물을 마련해준 사람들 

  우리가 새로이 조직을 만들고 우선 과제가 탈시설 운동이라고 하자, 활동비는 어떻게 마련할거냐, 활동가들은 손가락 빨고 살거냐며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회원들의 회비를 받아서 조직을 운영한다는 것이, 보통의 품을 팔아서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드러내진 않았지만 사실 우리 스스로도 막막했다. 각자 최소한의 생활비는 있어야 했으므로,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그런 찰나에 2005년 국가인권위 연구용역사업에 참여한 연구자들 중, 발바닥 활동가들을 제외한 사람들이 모여 연구비 중 일부를 모아 발바닥에 종자돈을 마련해 주었다. 나서서 후원을 조직한 박래군활동가는 훗날 연구자들이 너무나 자발적으로 600만원을 모금했다고 전했다. 발바닥은 갑자기 생긴 종자돈도 종자돈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또다시 감동했다. 그리고서는 1호 회원자리를 뺏겨 제일 아쉬워 한 이상엽회원(옥순의 옆지기)이 500만원의 후원금을 마련해 주었다. 그 마음들에 발바닥은 활동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장애우연구소에서 밀린 퇴직금이 들어왔다. 우리 각자의 생활도 어려웠지만, 일단 퇴직금을 좀 모아보기로 했다. 얼마 안되는 퇴직금까지 끌어다 쓰기엔 너무하다 싶었지만 나중에 발바닥이 재정여건이 좋아지면 갚기로 하고 일단 보태기로 했다. 이렇게 모아진 기금이 훗날 발바닥의 첫 번째 독립 사무실 보증금으로 소중하게 사용되었고, 활동가들의 퇴직금은 그로부터 8년 후에 돌려줄 수 있게 되었다. 

장애를 팔아먹지 않는다 

  우리는 발바닥의 이름을 정하기도 전에 재정의 원칙을 정했다. 투명하고 정기적으로 공개하자는 원칙이야 인권단체로서 당연히 지켜져야 할 일이었는데, 그에 더해 “기업 후원을 받기 위한 활동을 하지 않는다, 후원을 받기 위해 장애를 팔아먹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일부 장애인단체들의 기업을 상대로 한 모금활동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국제모금단체나 한국의 장애인시설들이 동정론에 기대 장애를 이용한 모금에도 반대하고 있었다. 이 원칙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다. 사실 기업 중에 누구인들 탈시설 운동을 지원할리 만무했으므로 우리가 정한 원칙 때문에 갈등할 일도 없었다.  

       
           
   
       
           
   
<재정의 원칙> 

□ 투명, 정기적 공개 
□ 기업 후원을 받기 위한 ‘활동’을 하지 않는다. 
□ 후원을 받기 위해 ‘장애’를 팔아먹지 않는다. 
- 2006년 3월 2일 회의록에서 - 
       
           
   
       
           
   


[사진 설명 : 2007년 양수리갔다가 돌아오는 길. 발바닥활동가들의 공식적인 첫번째 나들이 사진이다. 위에서부터 정하, 옥순, 효정, 소연. 옥순의 차안에서 발견한 축구공으로 미니 축구를 한판 하고 난후이다. 10년전의 우리들은 파릇파릇 했구나. 효정은 발바닥은 그만뒀지만, 현재 전국장애인부모연대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발바닥의 조직문화를 만들자 

  며칠 전(그러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2016년 6월이다) 옥순은 발바닥의 조직문화를 다른 진보적 장애운동단체들에게 소개하고 싶다고 자료를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발바닥의 조직문화, 어느새 10년이 지나 누군가에게 모범적으로 소개될 정도로 우리는 자신이 있나? 발바닥을 만들면서 이름처럼 자주, 열심히, 치열하게 논의했던 것이 바로 조직문화였다. 우리는 어떤 조직을 만들고 싶은가?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이제부터 한줄 한줄 써내려가는 것이 우리의 약속이 되고, 문화가 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조직문화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말하는 것인가도 불분명했다. 우리는 조직에 대해서, 조직운영에 대해서, 조직과 관련된 모든 논의들에 대해서 일단 열심히 이야기를 나눴다.  
       
           
   
       
           
   
조직도 생물이기에 영원한 마침표는 없다. 

   발바닥의 운동에 관심 있고 함께하는 사람들은 의사결정권한을 가진 회원인가, 그냥 후원금만 내는 후원회원인가? 발바닥은 회원단체를 지향하는가? 운동가조직인가? 사실 이런 논의들은 지금까지도 끊임없는 토론주제가 되고 있다. 우리는 평등한 조직운영을 위해서 상임활동가가 10명이 넘지 않아야 한다, 원탁에 둘러앉아 논의할 수 있는 규모 이상이면 안 된다, 부서나 파트가 생기고 직급이 생기는 것은 안 된다, 경력과 경험, 나이는 다르지만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모두가 책임을 공평히 나눌 수 있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 직급은 두지 않되, 집행을 위한 집행조정자(집행책임자라는 단어도 쓰지 않았다)만 두기로 했다. 우리는 그 당시 돈이 없기도 했지만 모든 활동가들에게 동일한 금액의 활동비를 지급하기로 하고, 모두가 책임지는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누구는 회원의 규모를 무조건 늘리기 보다는 활동가 1인당 100명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했고, 누구는 호강에 겨운 소리라며 일단 회원이 그 정도 늘어나면 그때 가서 논의하자고도 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조직의 의사결정을 어떻게 하느냐 였다. 우리는 농담처럼 화백제도(*신라시대에 부족 대표들이 모여 중요 사항을 합의하여 처리한, 씨족사회 전통을 계승한 회의로 만장일치제가 특징임)로 하자고 했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진지한 논의가 이어지고 이어졌다. 활동가들이 모두 동의되지 않았는데 집행하는 것이 맞느냐? 우리 중 누구하나라도 설득할 수 없는 논리라면 시민들을, 정부를 설득할 수 있느냐? 서로가 열린 마음으로 논의한다면 모두가 합의 못할 사안이 있을까? 다수결 방식은 폭력이다, 소수의견은 어떻게 존중될 수 있는가? 일을 좀 미루더라도, 마지막 단 한명을 설득하고 토론해서 집행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소수의 의견을 존중해 집행하지 않을 수 있는 힘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소수의견을 가진 사람도 다수의 위력에 밀려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다시 생각할 열린 자세가 필수가 아닌가? 선배활동가가 정보를 독점하거나, 후배라는 이유로 의견과 판단이 무시되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를 검열해야 했다. 결국 농담처럼 시작된 화백제도는 발바닥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만장일치제로 인해 중요한 결정을 미루고 미룬 경험도 있던 터라 결론이 필요한 논의는 마감시한을 정하고 논의하는 것으로 보안하기도 했다. 조직도 생물(生物)이기에 영원한 마침표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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