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이야기]

발바닥, 기억에 기록을 더하다(11)

  • 2016.09.21 23: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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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 기억에 기록을 더하다(11) 

발행일 : 2016.7.27(수)
발행 :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너무 오랫만에 보냅니다. ㅜㅜ 죄송합니다. 
<발바닥, 기억에 기록을 더하다> 1~10호까지는 1부 : "발바닥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제 2부 11~20호 : "비리와 인권침해에 맞서다" 편이 발행될 예정입니다.
살짝 미리 말씀드리면 3부는 탈시설투쟁, 
4부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현재 진행형인 활동들)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잘 보고 있다고 연락주신 회원님들, 
그동안의 원고를 넘기며 평가를 부탁했을때 흔쾌히, 꼼꼼히 원고 검토를 해준 분들, 
소중한 기록, 작은 민주주의의 역사로 남을 것이라는 찬사를 보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발바닥, 기억에 기록을 더하다> 전편은 발바닥 홈페이지에서 볼수 있습니다. 

       
           
   
       
           
   

비리와 인권침해로 얼룩진 S재단과의 첫 번째 싸움 : 

2003년-2004년 

       
           
   

 2003년,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내부고발을 시작하다. 


  우리가 미신고시설과 조건부로 등록한 시설의 인권문제로 몰입해 있을 때, S재단노조에서는 여러 차례 장애인단체나 인권단체를 방문하여 S재단의 비리와 인권침해를 알리고 도움을 호소했다. 노조원들이 말하는 인권침해 내용을 들어보면 여느 미신고시설의 인권문제와 비슷했지만, 그 규모면에서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1984년 정신요양원으로 시작한 S재단은 그 당시 산하 기관이 13개, 1000여명이 넘는 장애인이 살고 있었고 정신병원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국가로부터 받는 보조금도 년간 100억원이 넘었다. 비리와 인권침해를 제보하기 위해 노조를 결성하고 모인 직원의 수도 200여명이 넘었다. 미신고시설과의 싸움이 작은 국지전이라면 대형 사회복지법인인 S재단과의 싸움은 마치 세계대전 같았다. 

  S재단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대부분 철원과 그 인근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었다. 복지나 장애를 잘 알아서 취업 했다기보다는 철원지역에 이렇다 할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취업한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기혼여성들이었는데 그저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자식 키워본 경험으로 장애인을 돌보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이 순박한 사람들을 투사로 만든 것은 노동착취와 인권문제가 곪을 대로 곪아터진 이후였다. 

  S재단은 1997년 5월, 시설직원들에 의한 집단폭행으로 최ㅇㅇ이라는 장애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이미 보도된 적이 있었다. 폭행·사망하였음에도 S재단에서는 사망진단서를 허위로 발급하여 자연사 한 것으로 감추려고 했고 이것까지 밝혀지면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노조가 결성되기 전에도 양심적인 직원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실상을 알리고자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누구누구는 감독기관인 종로구청에 민원을 넣기도 하고, 경찰서에 제보도 했지만 제대로 조사된 적이 없었다. 그 당시 공익제보라는 개념조차가 낯설던 시절이었다. 양심적인 사람들의 개인적인 노력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자 2002년 말 비밀리에 노조가입서가 직원들 사이에 돌았고, 2003년 2월 23일에는 직원 400여명 중 244명이 대거 노조에 가입하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직원들은 노조를 결성하고 스스로 ‘내부고발자’가 되었다.  
       
           
   
<국민들에게 호소하는 글> 
  
(중략) 이곳은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 곳으로 추위가 극심합니다. 그러함에도 에너지절약 한답시고, 하루에 한시간 정도 외에는 난방을 돌리지를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릇에 담아 놓은 물이 얼 정도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장애인들 중에 동상이 안 걸린 이들이 없을 정도 였습니다. 그러나 감사가 오거나, 외부에서 손님이 올 때면 난방시설을 작동하는 이중적인 모습도 보였습니다. 오죽했으면 겨울에 난방시설이 얼어 터졌겠습니까?  

(중략) 대소변을 못 가린 이들이 있어 기저귀가 꼭 필요함에도 요양원측에서는 일절 제공이 없었고 이를 안타까이 여긴 직원들이 개인 돈으로 산 기저귀마저 압수를 했습니다. 장애인들의 의식주는 이렇게 뒷전으로 밀린 채 더 심하게는 개인의 영리목적을 위해 직원들과 일부 지적장애인들을 이용해 요양원내에 소를 100여 마리나 키웠고, 장애인들을 돌봐야 할 시간에 직원들을 강제로 이사장 개인소유의 밭을 경작하게 했습니다.  

(중략) 저희들은 지난 세월동안 신체장애인들과 정신장애인들의 보금자리로서 공공성이 보장되지 못하고 개인의 이윤추구의 공간으로 변해 버린 것에 대해 통탄을 금치 못하면서 다시는 성람요양원이 원생들을 볼모로 몇몇 개인의 이윤추구의 장으로 전락하지 않게끔 이러한 잘못된 모습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를 해낼 것입니다. 국민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2003년 3월 27일 
ㅁ,ㅇ 요양원 노동조합에서 드립니다. 
       
           
   
       
           
   

[사진설명 : S재단 노동조합은 자신들의 노동권 문제를 넘어서, 복지시설안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인권침해와 비리의혹을 고발했다. 2004년 7월 23일 노동조합과 연대단체들은 검찰청 앞에서 S재단의 이사장을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사장의 부인을 세탁원으로 이름을 올려 인건비를 1억4천만원을 횡령했고, 이에 대해 서울시는 환수조치만 하고 검찰고발은 하지 않았다. 이에 노동조합이 직접 고발하자, 검찰 또한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사진설명 : S재단의 인권침해와 노동력 착취, 비리의혹에도 불구하고 감독기관인 서울시와 종로구청, 감사원은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조합원들은 50여일간을 서울시-종로구청-감사원을 돌아다니며 문제를 호소했다. 이후 2년이 지난 후에야 이사장은 27억원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구속 기소되었다. 또한 시설직원의 성폭력 사건도 밝혀졌다. 노사갈등일 뿐이라며 외면했던 종로구청은 사회적 비판이 거세지자 그제서야 특별감사를 실시했다.]
       
           
   
       
           
   
162명의 소리 없는 죽음 

  직원들이 호소한 문제들은 이러했다. S재단의 시설들은 중증장애인이 살고 있는데도 겨울에는 난방을 가동하지 않아 너무 추워서 근무하기가 힘들었고, 봄가을에는 직원들이 장애인을 지원하는 본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사장 개인 농장에서 일했다. 이사장은 직원들만 동원한 것이 아니라 노동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장애인들도 동원했고, 장애인의 하루 임금은 5천원 때론 1만원 때론 솔담배 반갑 이었다. 이사장이 직원을 농사일에 동원하는 동안 시설에 방치된 중증의 장애인들은 변기의 물을 마시거나, 내내 묶여있거나, 다치는 사고가 빈번히 일어났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망하는 장애인들이 많았는데 감독기관인 종로구청의 통계에 의하면 9년 동안(1995년부터 2003년까지) 162명이 사망했다. 1년에 18명씩 사망한 셈이다. 추운 겨울에도 하루 한 시간 정도만 난방 했기 때문에 온종일 바닥에 누워있어야 하는 와상장애인은 동상에 걸렸다. 어느 노조원은 기자회견 자리에서 ‘씻기는 자기 손도 이렇게 시린데 찬물로 씻는 장애인의 몸은 어떻겠느냐’며 끝내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어느 노조원은 ‘우리들은 발 시리다고 실내화를 신고 다니는데 지적장애인들은 신겨놓은 양말도 다 벗어버려서, 자신은 출근하자마자 장애인의 바지와 양말을 꿰매놨다가 퇴근할 때 뜯어 놓고 간다’고 했다. 

  얼굴도 볼 수 없었던 조 이사장은 가끔 시설에 와서 사무실과 자기 농장의 소만 보고 갔고, 100마리 넘는 소의 먹이를 쌓아놓느라 직원들과 일부 장애인은 늦가을까지 총 동원됐다. 소 키우는 일에 동원된 장애인은 축사 옆 숙소에서 기거하면서 축사일과 불법 도축까지 해야 했다. 그곳에서 생활했던 고인이 된 故 지영씨의 인터뷰에서 그곳의 일상생활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밥오는 소리가 구르마 소리야, 병원 카터 처럼. 카터에서 식판에다 군부대 식판 같은거 거기다 밥이 딱 나오는데, 정말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밥이 나왔어. 다 썩은 콩나물에, 하얀 콩나물은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콩나물 무침에. 기름은 둥둥둥둥 뜬 그 배춧국, 그런 국에 김치는 군내, 그때가 5월이었거든. 5월 초였는데 그때까지도 김장김치를 주는데 그것도 아주 잘잘하게 다진 김장김치였는데 군내가 났어. 그걸 먹으라고 주는 거야. 그것을......” 

- 2007년 고(故) 지영씨의 인터뷰 중에서 - 
       
           
   

[사진설명 : 2014년 고인이 된 지영씨는 S재단이 운영하는 중증장애인요양원에서 7년동안 생활하다가 자립했다. 그녀는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밥을 주는 것에 항의하기 위하여, 거주인들을 조직하여 요양원으로 자장면을 배달시켰다. 배달된 자장면이 들어오려면 정문을 통과해야 했었는데, 그녀는 사무실에 가서 '우리가 자장면을 시켜먹겠다는데 뭐가 문제냐'며 항의하여 간신히 배달원이 정문을 통과할수 있었다. 그들에게 도착한 자장면은 '허락'을 받느라 불어터져 있었지만 그녀는 시간이 꽤 지난 후에도 이 에피소드를 재밌게 이야기 하곤 했다. ]
       
           
   
       
           
   

[사진설명 : 직원들이 이사장 개인의 농장일에 동원되는 동안 발달장애인 50여명당 4명의 직원이 배치되었다. 한 층에 4명씩 남겨진 직원들은 장애인을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이유로 손목을 뒤로 묶어 두었고, 묶인 손목을 잡아당겨 끈이 조여져서 장애인이 다치기도 했다.]   
       
           
   

[사진설명 : S재단이 운영하는 S정신요양원의 거주인들. 2006년 현애자국회의원실과 S정신요양원에 들어가려 하자, 입구를 막고 인권단체사람들은 들어올수 없다고 했다. 정문의 창살안으로 보이는 요양원의 운동장에는 수십명의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느린 걸음으로 돌고 있었다. 이들이 표정과 걸음걸이에는 사람의 생기라고는 찾아볼수 없었다. 이들의 남루한 옷차림과 까칠한 피부에서 이들이 어떤 처우를 받으며 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한 선수투입, 군출신이 복지시설을 장악하다. 

  244명의 내부고발자가 생기자, S재단에서도 가만있지 않았다. S재단은 조직을 주도하던 직원들 18명을 부당해고 했고, 20여명을 부당 징계했다. 부당해고 당했던 노동자들은 오랜 시간이 걸려 승소했지만 복직 후 다시 부당해고 당했고, 부당 징계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S재단은 노조와의 협상과 요구에 성실히 임하는가 싶더니, 이어 군 출신의 시설장과 관리자들을 채용하여 노조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월간 <함께걸음> 기자가 S재단 산하 ㅁ장애인요양원을 방문했을 때 만난 재단 측 관계자는 “노조문제 해결 하려고 군 출신 불러들인 것이다. 사회복지나 하는 유약한 원장이 노조원들을 당해 낼 수 있겠냐”라고 말하기도 했다. (함께걸음 2007.1.9.일 기사참조) 

  그러나 S재단은 노조가 제기하는 문제를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직원들은 노조를 결성하고 이사장 개인 농사일을 하지 않았다. 근무시간에 장애인을 지원하는 본래의 업무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되자 S재단은 키우던 소 100마리를 팔아버렸다. 장애인에 대한 열악한 처우들은 국가보조금이 적다는 이유로 S재단이 빨리 개선하지 않았지만 노조의 존재 자체는 S재단의 무소불위의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S재단은 조합원들을 개인적으로 협박하여 조합을 탈퇴시키고, 노조에 대한 온갖 유언비어를 만들었다. 관리자들은 야간근무 중에 조합원들의 사물함을 뒤지는가 하면, 꼬투리를 잡아 조합원들에게 시말서를 강요했다. S재단에서는 노동조합이 소속된 ‘금속노조 경기북부지회’를 문제 삼아 ‘장애인이 금속이냐, 왜 사회복지노조가 금속노조에 가입했냐, 금속노조가 조합비를 챙기려고 수를 쓴 것이다’고 떠들기도 했다. 당시 S재단 노조는 지역 내 공공노조가 없었기 때문에 공공노조와 상의하여 지역지회가 있었던 금속노조에 가입한 상황이었다. S재단에서는 노동조합의 그 무엇도 꼬투리 삼고 싶었으리라. 

무엇이든 노사갈등으로 몰아가는 감독기관 종로구청과 서울시 

그런데 정작 문제는 관리감독을 해야 할 종로구청과 서울시, 복지부의 태도였다. 노조에서 호소하는 문제들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보다는 S재단의 모든 문제를 노사문제로 귀결시켰다. 노조에서 국고보조금을 어떻게 횡령하고 있는지, 인권침해가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를 제보해도 모든 것을 노사갈등으로 몰아갔다. S재단이 운영하던 송추정신병원이 과징금을 물게 된 데 대해 당시 현애자국회의원실에서 질의하자 복지부 담당자는 “아마 몇 천 만원의 과징금을 물게 될 것이다. 그 이상 더 많이 물려서 송추병원 문 닫으면 그 환자들은 어쩌란 말이냐”라고 대답했다. 그 시설과 정신병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사회의 안전을 위해서 수용된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서는 안 된다는 괴기한 인식이 담당 공무원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입술을 꼭 깨물며 참아 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열심히 싸워서 저 추운 요양원 안에 있는 원우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사람답게 살수 있다면,  그리고 그토록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고 사측의 노예처럼 일만해야 했던 그 암울하던 시절을 위하여서라도 여기 모인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쌍한 원우들을 무기삼아 이제껏 삶을 영위하고 있는 저 악독한 이사장이 법의 심판대에 오르는 것을 꼭 볼 것 입니다.   우리가 지금의 이 고통을 참고 또 참아서라도 끝까지 싸워서 우리 장애원우들의 인권도, 우리 짖밟힌 노동자들의 인권도 반듯이 찾을 것입니다. " 

- 당시 지역 주민들에게 호소하는 조합원 J씨의 글 중에서 - 
       
           
   
       
           
   
2004년, 질긴 놈이 되자. 

  노동조합의 호소만으로 정부와 사회를 설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노동조합에서는 2003년 말, 철원과 송추 등 경기 북부지역의 단체들과 <비리재단, S재단 퇴진과 민주재단 건설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시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려나갔다. 그러나 조 이사장은 지역 안에서 유력 인사였다. S재단 사무처장은 “철원지역에서 철원군을 제외하고는 제일 큰 사업장이었기 때문에, 경찰서장과 군청과장, 경찰서 정보과장 등이 인사청탁을 해온다”(함께걸음 2004.8.1. 기사중 S재단 심ㅇㅇ사무처장 인터뷰)고 말할 정도였다. 사태를 해결하려면 지역을 벗어나야 했다. 더욱이 시설은 철원과 송추에 있었지만 감독기관은 서울시와 종로구청이었다. 노조에서는 서울에서 이 문제를 이슈로 만들지 않으면 풀리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조합원들은 간간히 서울에 와서 기자회견을 하다가 급기야는 ‘도보순례’라는 이름으로 매일매일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서울시청-S재단-종로구청-감사원을 돌면서 문제를 호소했다. 그러나 노동조합에서 고발하는 건건마다 검찰은 기소조차 하지 않았고, 감사청구를 해도 감사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편으로 노조에서는 계속해서 연대할 단체들을 찾아다녔다. 노동조합의 끈질긴 노력으로 다시 한번 전국단체로 다시 연대조직을 결성했다. 2004년 <장애인인권회복·S비리재단 퇴진과 정상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였다. 그러나 다시 구성된 연대조직에 참여한 단체는 경기북부지역의 단체를 제외하고는 에바다학교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전부였다. 2004년 당시에는 사회복지법인의 비리와 인권침해에 맞설 단체를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소수의 단체가 모였지만, S재단의 총체적인 비리와 인권침해를 고발하는 기자회견을 계속 열었다. ‘질긴 놈이 승리 한다’는 명제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요양원 자식들은 소만도 못한가요? 

2003.3.27
박정혁 
(전 ㅇ요양원에서 거주인) 

이사장 아버지가 서울서 오신데요.  
요양원원장님의 구수한 방송 멘트.  
"각층 보모 선생님들은 
서울서 이사장님 일행이 오신 다니까  
원생들 복장 단정히 해주시고  
각 구역 청소 깨끗이 해주세요!"  

이사장 아버지가 우릴 보러 오신데요.  
엄마들은 바쁘게 가운을 걸쳐입고 엄마들은 맡은 아이 하나하나살펴요.  
새옷 한벌 못 구해 입힌것도 자신들의 죄인양  
옷장을 모두 열고 
가장 좋은 옷을 골라도 
누군가가 입다 가져온 헌옷들만 나와요.  
엄마들은 더 바쁘게 
맡은 구역 열심히~열심히  
쓸고 닦고 그것도 모자라  
뒷산 우사 가는 길에는 
먼지 하나 없도록 쓸고 또 쓸고  

이사장 아버지가 서울서 오셨데요.  
요양원 원장님의 또다른 방송멘트.  
"각층 보모 선생님들은 
이사장님 일행이 곧 착하시니까  
당번만 남으시고 
모두 현관으로 내려오세요!"  

이사장 아버지가 우릴 보러 오셨데요.  
엄마들은 아이들 밥 먹여 주다 말고,  
엄마들은 바삐~바삐 청계단을 내려가요.  
가슴엔 불평불만 가득가득 품고서  
초조한 걸음으로 바쁘게 현관으로  
각방에 남겨진 밥숟갈들의 원성이 
엄마들의 귓가에 메아리쳐 울리네요.  

이사장 아버지가 서울서 오셨데요.  
검은 승용차에서 무거운 몸 내리셨는데  
검은 우산 쓰시고서 눈길 한번 안주네요.  
성큼성큼 엄마들을 외면하시고  
요양원의 자식들은 거들떠도 안보시고 
이사장 아버지는 소만보고 가셨데요.  
       
           
   
[사진설명 : 위로부터 1~5번 사진. 1번은 장애인들이 동원되어 불법도축하던 장면. 2번은 요양원과 주변 이사장의 땅에 건축, 청소, 수리 등에 동원됐던 사진. 3번은 이사장의 농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 4번은 직원들이 농사일에 동원되는 동안 방치된 장애인이 넘어져 머리를 꿰맨 모습. 이후에도 같은 사고가 여러차례 발생. 5번은 거주인의 양말.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애인의 양말이 다 헤져서 뒤꿈치가 나와 있는걸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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