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립생활이야기]

두번째이야기_“모두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 2013.02.12 1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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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고은경

“안녕하세요. 조수양입니다.”

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던 10월 어느 날, 서울 광화문 근처 한 카페에서 마주한 그녀의 표정은 무척이나 명랑했다. 마흔을 넘겨 쉰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가을 햇살을 한껏 머금은 얼굴 속에서 그녀의 눈빛은 찰랑댔고, 미소는 잔물결이 일렁이듯 넘실댔다.

그녀는 편안했다. 아니, 편안함을 넘어서 행복해 보였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서 그런 따스한 기운을 느껴본 지가 언제였던가? 그렇게 그녀와의 첫 만남은 그리워하던 옛 벗의 손을 맞잡은 듯 따뜻했고, 가을날 해 질 녘 갈대밭의 물결처럼 설레듯 푸근했다.

시설이란 감옥을 등지고 새로운 삶을 따뜻하게 그려나가고 있는 그녀, 조수양. 그녀는 자유로운 자립생활을 통해 행복한 빛을 발하고, 사랑이란 온도를 모두에게 전하고 있었다

즐거운 첫 만남

수양 씨를 취재하기 위해 약속 장소인 서울 광화문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녀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고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조수양 씨죠?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던 이승현입니다.”

그녀는 “네, 안녕하세요”라고 대답하며 환한 웃음으로 반겼다. 그것이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은 평소 만나 왔던 사람들과의 첫 만남과는 뭔가 달랐다. 어색하고 불편한 기운이 감돌기 마련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첫 만남. 그러나 수양 씨와의 첫 만남은 익숙함과 편안함이 함께하는 따뜻한 공기가 맴돌았다.

사람의 감정은 전염성이 강하다. 행복한 사람의 온도는 겨울날 난로처럼 주위를 데우고 그 온도를 느끼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런 사람을 일컬어 훈훈한 사람, 따뜻한 사람이라 했던가. 수양 씨의 첫인상은 그런 사람의 향기가 짙게 전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내내 무언가 모를 따뜻함과 좋은 기분이 함께 했다. 얘기를 나누다 마주친 눈빛은 창 안으로 들어오는 가을날의 빛바랜 햇볕처럼 따뜻했으며, 목소리는 시끄러운 카페 안에서도 잔잔히 울려 퍼지는 듯했다.

그녀와의 두 번째 만남은 그녀의 신혼집이 꾸려져 있는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 이루어졌다. 그렇게 이루어진 두 번에 걸친 만남은 인터뷰어(Interviewer)와 인터뷰이(Interviewee)의 무거운 질의응답이 아니라, 평소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아는 누나와 만나 나눈 가볍고 즐거운 대화였다.

그녀는 인터뷰 도중 이런 말을 했다.

“전 친해지면 말이 많아져요.”

그래서 난 대답했다.

“그럼 우리 이제부터 친해져 볼까요?”

기댈 수 있는 사람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결혼하니 무엇이 가장 좋던가요?”

첫 만남에서 시작된 첫 대화에서 건넨 말이다. 자립생활을 시작한 후 그녀의 생활 중 가장 큰 변화는 아마도 결혼이 아닐까? 그렇기에 다소 뜬금없으리라 여길지라도 결혼을 화두로 올린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터. 역시 결혼이라는 말에 그녀는 대답에 앞서 수줍게 웃었다. 이윽고 “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가장 좋더라”고 입을 열었다. 당당하게 시작했던 그녀의 자립생활은 지난 2012년 5월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녀가 말한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는 의지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의미뿐만 아니라 같은 장소에서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자고, 언제나 대화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그녀가 지금 있는 곳에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녀의 삶, 특히 자립생활에 큰 힘이 됐다.

“2011년 5월 한 언론과 인터뷰할 때의 사진을 봤는데 그때보다 얼굴이 더 좋아진 것 같아요. 결혼생활의 행복이 얼굴에 묻어날 만큼 지금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건 아닌가요?”

장난기 섞인 질문에 그녀는 웃기만 했다. 이어서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지금 같이 살고 계신 분, 남편에 대한 자랑 좀 해주세요.”

그녀는 웃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변함없다는 것이 장점이에요. 처음 만났던 그때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면 바뀐 게 없어요.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네요. 첫인상이 참 좋았었어요.”

결혼 후 생활에서 어떤 면이 달라졌느냐는 이어진 질문에 수양 씨는 괜한 투정을 부렸다.

“혼자 지낼 때는 나만 생각하면서 내 생활을 이어 나가고 나 자신만 책임지면 됐는데 지금은 한 사람이 더 늘어났으니 나뿐만 아니라 옆 사람도 챙겨야 해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더 많아졌어요.”

그런 투정도 달게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현재의 행복한 결혼 생활이 담뿍 묻어났다.

자유가 가져다준 희망

“요즘은 주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대화 내용을 결혼에서 벗어나 요즘의 다른 생활에 대해 물었다.

수양 씨는 열악한 대한민국 장애인 복지의 현실을 알리고 바꾸기 위해 장애인 활동가들과 함께 장애인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앞서 그녀를 처음 만났던 장소는 서울 광화문역 노숙농성장이었다. 이곳은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알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10만인 서명운동과 대선 후보 등 정치인들에게 그 필요성을 강조하는 엽서 쓰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 장소다.

수양 씨의 모습이 처음 눈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쌓인 엽서와 서명부가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지나가는 시민에게 서명과 엽서 쓰기 참여를 독려하고 있었다.

“시간과 건강이 허락한다면 어려운 장애인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장애인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싶어요.”

그녀는 하고 싶은 게 정말 많다. 자립생활 이후 그녀의 삶에서 가장 달라진 것은 바로 자유가 아닐까. 그녀에게 찾아온 자유는 희망과 꿈으로 가득한 삶을 채워줬다.

수양 씨는 줄곧 글쓰기와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문학동아리 활동에서 시 쓰는 법을 어느 정도 배워 자신만의 시도 만들어나갔었다. 그녀의 시는 ‘사랑, 이별, 자신’에 초점을 맞췄었다.

“지금은 예술·문학 활동에서 손을 떼고 있지만, 좋아했던 글쓰기와 그림은 2년 후 즈음에 다시 공부하고 싶어요.”

그녀가 그려나갈 그림과 써내려나갈 시, 그 아름다운 희망에 대한 기대가 잠시 느껴졌다. 그러나 수양 씨의 가장 큰 꿈은 상담사다. 심리학을 공부하여 전문 상담사가 돼 모든 사람이 안고 있는 마음에 엉킨 실타래를 풀어 주고 싶은 게 그녀의 소망이다.

수양 씨는 이를 위해 지난해 방송대학교 청소년교육학과에 입학했었다. 그래서 입시 위주의 현재 교육 환경에 지친 청소년들의 어려움을 듣고 그들의 마음을 치료하고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교육의 내용은 수양 씨의 기대와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 지금 그녀는 다른 방법을 찾고 있다.

“청소년교육학과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저랑 너무 안 맞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중단한 상태랍니다. 누굴 상담하고 싶으냐고요? 글쎄요. 상담 대상은 아직 정한 건 아니지만, 굳이 그런 걸 정해 놓을 필요가 있나요?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은 많고 그들이 가진 고민도 제각각이니까요. 무엇이든 좋아요. 예전에 청소년 상담을 하고 싶었을 때도 그랬어요. 학업이든, 이성이든, 가족이든, 개인적인 문제든…청소년들의 모든 고민을 다 들어보고 싶었어요.”

사람은 참 현실적인 생물이다. 남이 나에게 마음을 주는 것만큼 나도 마음을 내주기 때문이다. 마음을 걸어 잠근다면 상대방도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마음을 열어 놓는다면 상대방도 여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반적인 규칙이자 거래가 아닐까. 그러나 수양 씨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상대방을 맞는다면 그 사람도 나에게 본래의 마음을 보여 줄 것이다’라는 것이 수양 씨의 생각이다.

수양 씨는 영화배우이기도 하다. 그녀는 지난 9월 열린 장애인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두 번째 계절>(감독 영)의 주인공을 맡았었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구성된 <두 번째 계절>은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하면서 겪은 생활을 보여주는 동시에 장애여성에게 독립이란 무엇이냐는 메시지를 던진 영화였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찍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40분 정도의 러닝타임 분량을 6개월가량 찍었는데. 정말 힘들더라고요. 사진 찍는 것은 좋아하지만 긴 시간 동안의 촬영은 지칠 수밖에 없었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뭐냐는 질문에 그녀는 위와 같이 대답했다.

“혹시 다시 다큐를 찍고 싶은 마음은 있나요? 영화가 아니라 방송 등 다양한 매체에?”

이 물음에 수양 씨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그녀의 영화 촬영은 많은 것을 남겼을 것이다. 자립생활 이후 새롭게 꾸려진 삶과 생활을 점검하기도 했을 것이고, 자립생활의 좋은 점과 나쁜 점도 비교해보고 생각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도 됐을 것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힘들었지만, 다시 하기는 싫지만, 다시는 경험해보지 못할 소중한 경험이 아니었을까.

“나는 음식은 고기 빼고 비교적 다 잘 먹어요. 특히 나물 같은 채소류를 좋아하죠.”

대화 주제를 가볍게 바꿨다. 시설에서 생활하던 시절, 그곳에서의 음식은 제대로 갖추어져 있을 리 만무했다. 그곳에서는 제대로 된 음식조차 구경하기가 어려웠기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수양 씨의 행복이었다.

앞으로 설계해 나갈 희망과 꿈, 미래도 중요하지만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 그것이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가장 소중한 행복이 아닐까.


사진 :고은경

‘감옥’을 벗어나 밝은 미래를 찾아

수양 씨가 시설에서 나와 현재의 행복을 찾기까지의 과정도 쉽지만은 않았다. 수양 씨는 목 아래 신체는 움직이기 어려운 중증뇌병변장애를 갖고 있다. 수양 씨의 부모님께서 수양 씨가 장애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녀가 3살이 되던 해였다. 부모님은 앉지도 서지도 않던 아이를 바라보며 그저 성장이 늦은 줄만 알았었다.

8살 무렵 그녀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언니가 사준 옷을 입고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게 됐는데 그때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처음 느꼈어요.”

그때부터 자신의 생활과 다른 아이들의 생활도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12살이 돼서야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당시 특수학교라곤 서울 외에는 대구에 단 하나 있었고, 어머니가 너무 힘들어한 탓에 1년만 다니고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수양 씨 인생의 큰 변화는 16살에 찾아왔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데다 지병이 있으셨던 어머니께서 세상에 등을 돌리셨다.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상이셨던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살아가는데 있어 큰 기둥이었고, 기댈 수 있는 친구이자 든든한 조력자였다. 그 후 집안이 어려워지고 어머니가 없는 수양 씨의 생활도 제대로 이어가기 어려웠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그리고 가족에게 누를 끼치기 싫었던 수양 씨는 결국 17의 나이에 스스로 시설이란 곳을 선택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 달랐던 시설에서의 생활은 그녀를 답답하고 막막하게 했다. 그래서 스무 살을 넘어서면서부터 그 감옥과 같은 답답한 공간, 시설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됐다.

시설을 나가겠다고 결심한 후 그 사실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렸을 때의 반응은 둘로 갈렸다. 해보라고 적극 지지했던 사람,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 수양씨가 시설을 나가겠다고 결심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시설이 싫었어요, 전. 나가게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다시는 시선조차 돌리기 싫은 곳, 시설은 그녀에게 벗어날 수 없는 답답함만 안겨주었다. 수양 씨가 시설에서 나오기 전 장애인 인권 운동 활동가들과 시설과의 긴 싸움이 1년여 동안 이어져 온 터였다. 수양 씨는 시설에서 나가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시설의 반대에 부딪혔다. 시설은 그 활동가들을 믿지 않았고 나를 믿지 않았다.

가장 큰 도움을 줬던 이는 그녀의 친구이자 시설에서 일하던 직원이었다. 나이는 두 살 어렸지만, 그 친구는 수양 씨가 시설에서 나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독려하고, 충고하고, 지원해줬다. 그 친구는 시설을 그만둔 뒤에도 수양 씨의 탈시설을 계속 지지해줬다. 그 친구 때문에 수양 씨는 그곳을 나가겠다는, 그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죽어도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던 그 시설을 나가기까지 그녀가 지녔던 가장 큰 힘은 그녀가 가진 탈시설에 대한 의지였을 것이다.

인권운동 활동가들이 그녀의 탈시설을 계속 도왔고, 시설은 그들을 막았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수양 씨는 사회복지 공동모금회에서 시행한 ‘주거복지사업’에 선정됐고 그렇게 마련한 집, 생애 첫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 시설에는 충분히 나와서 살 수 있는 친구들이 참 많았어요. 그 친구들과 함께 나오지 못해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두고 나온 친구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짙었지만, 수양씨는 그녀가 얻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과 희망에 더욱 마음이 설레인다. 수양 씨는 지금 행복하다. 시설에서의 아픈 기억 따위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남한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인터뷰 끝에 그녀가 던진 한마디다. 그녀가 이제부터 미래를 위해 그려 나가야 할 숙제를 자신에게 던진 셈이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두 팔 벌려 미래를 맞이하고 있는 수양 씨의 밝은 미소는 현재의 행복뿐만 아니라 다가올 미래의 행복도 함께 보여주고 있었다.

인터뷰 후기

수양 씨와의 인터뷰가 이어지는 내내, 아니 인터뷰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대화였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아무튼 필자와 그녀와의 대화는 밝은 분위기에서 진행된 즐거운 시간으로 가득 채워졌다. 글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술은 얼마만큼 마시는지,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밥은 하루 몇 끼 정도 챙겨 먹는지 등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중간 마다 끼어들었다. 그만큼 수양 씨와의 대화는 오랜만에 동네 누나를 만난 것처럼 편안했고 즐거웠다. 나중에야 든 생각이지만, 아마도 그녀가 지금 느끼고 있는 ‘행복’이라는 감정 일부분이 나에게도 전해졌던 것 같다. 행복한 사람 주위에는 행복이 머문다. 수양 씨는 자신의 행복을 나에게도 나누어주었다. “모두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던 수양 씨와의 만남은 이미 삶에 지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느낀 시간이었다.

글 이승현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함께걸음> 기자



발바닥 회원님들!
안녕히세요?
설연휴 잘보내셨어요? 짧은 연휴라 아쉬움이 많이 남으시죠?
오랫만에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는지..
명절 연휴 동안 먹고 자고 했더니 오늘 출근길이 넘 힘들었어요.. 올해는 어느해보다 쉬는날이 적어요. (흑흑..)
하지만 회원님들..
즐거운 한주 보내세요.

오늘은 두번째 탈시설-자립생활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이 글을 무단으로 사용하실수 없음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사용하실 일이 있으시면 당사자에게 꼭 동의를.. 부탁드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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