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닥, 기억에 기록을 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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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 2016.5.20(금) 4호
발행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발바닥 회원님들께>
지난 10년간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과 ‘탈시설운동’이 전개되어 온 과정을 회원님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발바닥행동이 왜 만들어졌는지, 탈시설운동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매주 1회 메일과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추후에 이 내용을 다듬어 발바닥 10년사 자료로 묶을 예정입니다. 언제든지 회원님들이 의견을 주시면, 향후 자료제작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의견주실 곳 : footact@hanmail.net" target="emptyframe" style="text-decoration: none;">footact@hanmail.net(김정하 개인메일) 담당 김정하 010-3252-9463
<보내주세요>
발바닥행동에게 보내는 회원님들의 응원의 메시지를 5월 한달 동안 받습니다. 문자, 카톡, 페이스북, 텔레그램 등 각종 방법으로 보내주세요. 사진 한 장으로 마음을 전해주셔도 좋아요!
마감 : 2016년 5월 31일
보낼 곳 : footact@hanmail.net" target="emptyframe" style="text-decoration: none;">footact@hanmail.net(김정하개인메일), 담당 김정하 010-3252-9463,
발바닥, 기억에 기록을 더하다(5)
– 칠준위 결의와 시설공대위의 탄생
2003년, 시설을 치러 가자!
2003년 10월이었다. 용인에 있는 둥지골 수련원에서 열린 2회 전국인권활동가대회. 우리는 여기서 “칠준위”를 결의했다. 칠준위는 ‘칠 준비위원회’의 준말이었다. 인권활동가대회에서 만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운동사랑방, 천주교인권위원회의 활동가들은 각 단체마다 제보받고 상담받은 시설인권침해 사건들을 두고 난감해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 현장으로 달려가 사건을 파헤치고 싶었지만, 시설의 닫힌 문을 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모두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열정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전략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활동가대회의 뒷풀이 자리에서 오고 간 서로의 고민들이, 조직결성, 전략구상, 연대결의로 이어졌다. 그 자리에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김칠준변호사까지 합석하면서 그 전략은 더 구체화되어 갔다. 그날 밤 우리는 술잔을 높이 들고 일단 시설에 ‘들어가기로’ 결의했다. 당시 법적으로 시설 안에 인권활동가가 들어갈 수 없었고, 피해자가 밖으로 나와 우리를 만날 수도 없었음으로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그냥 어떤 수를 써서든 들어가는’ 것이었다. 활동가들이 주거침입으로 잡혀가도 법률적 지원을 전폭적으로 해 주겠다는 김칠준변호사의 이름을 따서 가칭 ‘칠준위’로 하기로 했다. 피해자들이 말하는 이중삼중의 철문의 밀고 들어가야 했으므로, ‘시설을 치러 갈 준비위원회’ 는 그날 그렇게 결의 되었다.
“문제가 된 시설을 치러 가는 거야. 혼자 독박 쓸 수는 없으니까, 우리 같이 가자. 같이 가서 쳐 들어가는 거야 그냥” 누군가의 말에 모두 웃었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으리라는 걸 다들 어렴풋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결성된 ‘칠준위’는 2003년 11월 26일에 <조건부신고복지시설 생활자 인권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준), 이하 ‘시설공대위’> 라는 조직으로 정식 출범했다.
조건부시설공대위에 함께 한 조직들
초창기 ‘시설공대위’는 7개 단체로 시작했다. 대한정신보건가족협회, 인권운동사랑방, 인천여성의전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좋은집, 태화샘솟는집, CMHV(지역사회정신건강자원봉사단). 첫 사건이 정신요양원 사건이었기 때문에 정신장애인 인권에 관심 있는 조직이 주로 참여 하였다. 이후 6개월 만에 조직은 23개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조건부신고복지시설 생활자 인권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준) 참여단체 : 경기복지시민연대, 노들장애인야학, 대한정신보건가족협회, 섬김과나눔회장애인봉사대, 안산노동인권센터, 인권운동사랑방,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인천여성의전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장애인교육권연대,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전국학생연대회의, 좋은집, 천주교인권위원회, 태화샘솟는집, 한국뇌성마비장애인연합, 한국산재노동자협회,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노동조합,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한국장애인IL단체협의회, 행동하는의사회, CMHV(한국지역사회정신건강자원봉사단) (이상 23개 단체)]
발바닥, 기억에 기록을 더하다(6)
– 2003년, 양평 성실정양원 사건
기도원에 갇힌 200여명의 삶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센터로 상담전화가 걸려온 것은 2003년의 여름이었다. 자신이 억울하게 129(사설 응급이송단)에 의해 잡혀 들어가, 양평의 기도원에 있다가 간신히 나왔는데 방송국에 제보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상황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의 말을 도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싶었다. 여름에 전화가 걸려왔지만, 그는 알콜중독 증세로 또다시 가족에 의해 기도원으로 보내져 연락이 두절됐다. 다시 연락이 왔을 때는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곳에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가족 중에 알콜중독자가 있어 입소를 하고 싶다며, 양평에 놀러왔다가 지나는 길에 간판보고 들렀다고 둘러대고 성실정양원에서 입소상담을 받았다. 3중으로 닫혀 있는 문, 문을 지키던 사람, 담벼락마다 감긴 철조망과 창문마다 설치된 쇠창살이 눈에 들어왔다. 입소를 안내하던 직원은 알콜중독자를 양평까지 편하게 데려올 수 있는 방법으로 129를 적극 추천했다. 10여만원만 있으면 ‘문제가 되는 가족’을 129가 알아서 이 기도원으로 데려온다고 했다. 상담하던 사무실 탁자에는 전국의 129를 운영하는 회사들이 보낸 홍보물로 꽉 차 있었다.
답사를 마친 우리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200여명의 사람들이 갇혀 있다고 생각하니, 뭘 어떻게든 빨리 추진해야 했다. 마침 인권활동가대회를 통해 시설공대위를 만들었으니, 그 다음은 행동을 게시하는 일이었다. 2003년 11월 4일, 우리는 김홍신의원실, 언론인들과 함께 성실정양원을 처음으로 ‘쳐’ 들어갔다.
[꼭 밝혀져야 할 ‘사설 응급이송단(일명 129)’의 문제]
영화 <올드보이>를 본 사람들이라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강제로 누군가를 어떤 곳에 불법 감금하고자 할 때, 129라 불리는 사설 응급이송단이 이용되고 있다는 언론보도와 문제제기가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129는 응급구조의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주로는 정신질환, 알콜중독자 등을 강제입원 또는 구금 시키는 데 악용되어 왔다. 의뢰자가 가족인지 제3자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수갑이나 포승줄로 결박시키고 의뢰자가 원하는 곳으로 ‘배달’한다. 그 곳이 허가된 의료시설인지 불법 감금시설인지 불법 종교시설인지 확인하지 않는다. 성실정양원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납치되어 감금되었으며, 그 납치와 이동을 129이송단이 했다고 지목했다.]
이곳은 형기 없는 감옥입니다
1975년에 생긴 성실기도원은 종교시설로 시작했으나 언젠지도 모르게 성실정신요양원(줄여 ‘정양원’)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200여명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알콜중독, 정신질환, 원한관계, 가족 간의 재산다툼 등 이러저러한 이유로 ‘보내진’ 사람들이었다. 미성년자부터 노인까지 연령도 다양했다. 가족 간의 다툼으로 형을 보낸 동생은 몇 년후엔 형의 딸마저 성실정양원에 보냈다. 아빠를 보고 싶어 했으니 아빠와 함께 살라면서 말이다.
그곳은 마치 사설 감옥과 같았다. 하루 4번의 예배가 일과였으며, 말을 듣지 않으면 십자형으로 묶어두거나 징벌방에 갇혀야 했다. 안수기도라는 이름으로 온갖 폭력이 가해졌다. 수용인 중 중간관리자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나머지 수용인들을 감시, 통제, 체벌, 폭행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정신요양원이라는 이름이었지만 정신감정 없이 입소되었거나 진단서가 있는 경우라도 10년이 넘었거나, 정신과 진단과 상관없는 진단서가 첨부되어 있기도 하였다. ‘대민 봉사’를 한다며 자원봉사서를 쓰게 하고 하루에 담배 5가치를 주면서 강제노역을 시키기도 했다. 나가서 일하면 바람도 쐬고 담배도 피울 수 있고, 운 좋으면 커피도 한잔 얻어먹고 시간도 잘 흘러가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고도 했다. 수용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CP라는 향정신성 약물을 먹이고 전화, 편지, 면회를 검열 감시했다.
성실정양원에 도착한 후 우리는 김홍신의원실을 통해 양평군 시설 담당공무원을 현장으로 불러냈다. 그에게 제보된 인권침해 내용을 알린 후, 바로 들어가 확인하자고 했다. 갑자기 불려나온 공무원은 허둥지둥 갈피를 못 잡았다. 우리는 지방자치단체의 감독권한으로 인권침해를 확인하는 것은 공무원의 의무이며 책임임을 상기시켰다. 밖에서 큰소리가 오가자 수용인들은 놀라고 굳은 표정으로 외부인들을 주시했다. 그들에게 지금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수용인들을 예배당에 모이게 하고, 우리가 누구이며 온 목적이 무엇인지를 설명했다. 여러분들이 처해있는 인권상황을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누군가는 시니컬한 표정이었고, 누군가는 진지하고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갑자기 들이닥친 우리를 믿기란 쉽지 않으리라 당연히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200여명 중에 150여명이 준비해간 인권상황조사 설문지에 응답했고, 100명은 1:1로 면접조사를 할 수 있었다.
“저는 20년 전에 들어왔는데, 그때 알콜중독이라고 가족들이 보냈거든요. 근데 내가 여기 잡혀 들어와 20년 넘게 술 안마셨으면 이제 나는 알콜중독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가족들이 반대한다고 나를 내보내주지 않아요. 감옥은 언제 형기가 끝난다는 희망이라도 있지, 여기는 그런게 없어요. 여기는 형기 없는 감옥이예요. 그래서 내가 여기서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 누구 하나를 죽이거나, 여튼 사고를 쳐서라도 감옥으로 가고 싶었어요. 그럼, 감옥에서 몇 년을 살더라도 여기보다 나을 거 아니예요. 거긴 나갈 수 있으니까. 선생님들 안 왔으면 내가 오늘밤에라도 사고 쳤을지 몰라” 50대 남성은 자신의 인생이 여기서 이대로 마감할지 모른다는 절망감을 호소하며 제발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갈 곳 없는 사람들
조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수용인들에게 우리가 돌아가 조사결과를 근거로 가해자들을 고발하고 이곳에서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들의 눈빛은 ‘우리를 두고 가지 마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열어 놓은 철문을 다시 닫고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하지만, 당장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나가서 약속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헤어지는 인사를 하자 절절한 눈빛들이 우리의 뒤통수 끝까지 따라왔다.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 지금 당장 나가고픈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두고 나와야 했다.
바로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복지부와 경기도, 양평군 담당자들을 괴롭혔다. 그래도 쉽게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이듬해인 2004년 6월에야 책임자인 부원장이 구속됐다. 복지부와 경기도는 수용인들을 계속 퇴소시키고 있다며 퇴소자 명단 86명을 줬다. 하지만 그들을 일일이 추적조사한 결과 다른 시설로 보내졌거나, 성실정양원으로 다시 돌아왔거나, 퇴소자체를 안했는데 허위로 기재된 경우도 있었다. 우리는 2004년 8월 31일, 장향숙국회의원과 함께 다시 한번 성실정양원을 쳐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우리 눈으로 직접 시설이 폐쇄됐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우리가 다시 방문하자, 이번에는 철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들어가려 하자 문을 닫고 종교 사유지침입이라며 목청을 높였다. 취재 온 기자들과 장향숙의원만 들어오라고 했다. 인권단체 사람들은 절대 들어올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한번 당해 봐서 인지 저들의 저항방식도 세련되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가만있을 우리도 아니었다. 우리는 철문 사이로 팔다리를 끼어 넣고 실갱이를 벌인 끝에 밀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고발당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일전에 인터뷰한 알만한 사람들이 꽤 남아 있었다. 그들에게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느냐고,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가슴을 후벼 팠다. 어떤 이는 가족들이 연락을 끊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갔는지 통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돈 한푼 없이 어디 갈 데도 없고 나가지 못했다고 했다. 혹시 가족들이 자기를 찾으러 이곳에 올지도 모르니 기다린다고 했다. 어떤 이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기를 다시 시설로 보낼 것이 뻔 하기 때문에 차라리 있던 시설에 있는 게 그나마 나을 거 같다고 했다. 어떤 이는 가족도 없고 나가봤자 돈도 없어서 도둑질이나 할 거 같아서 여기 있겠다고 했다. 모두들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가족들에 의해 감금된 사람들, 이들이 가족 안에 다시 설 자리는 없었다. 수십년간 사회로부터 격리된 사람들에게 다시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그 어떤 시스템도 없이, 문만 열어놓고 자유롭게 나가라고 한 것은 이들을 다시 한번 절망에 빠뜨렸을 것이다. 이들이 얻은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다.
종교시설이라는 치맛자락 속에 숨어들어간 미신고시설
성실정양원 운영자들은 이제 태도를 바꿔, 자신들은 ‘순수한 기도원만’ 운영한다고 했다. 이제부터는 각자가 자발적 의사에 의해 종교적인 이유로 들어와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정신요양원 안 할테니 간섭하지 말고 나가라고 했다. 옛날 그대로,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이제부터 자기들은 종교시설이라는 주장에 경기도와 양평군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도는 ‘성실정양원은 2004년 11월 4일 기준으로 수용자 전원이 퇴소되어 조건부신고시설을 자진 철회 시켰고 순수한 종교시설로만 운영토로 조치했다’고 공식적으로 답변했다. ‘혐오감을 주던 철조망 울타리를 제거하고 출입문을 개방한 것으로 보아 생활환경이 개선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답변했다. 원장으로부터는 각서를 받았다고 했다. 이제는 종교시설이라서, 감독 대상이 아니므로 이걸로 정부의 역할은 다한 것이라 했다. 미신고시설의 인권문제는 이렇게 종교시설이라는 치맛자락 속에 숨어버렸고, 정부를 이를 용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