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전국장애인조건부시설조사 :
마땅히 사람이 살아야 할 곳은 어디인가?
사변사의 첫 번째 활동, 전국의 장애인시설 인권상황 실태조사
우리는 장애우연구소를 그만둔다고 하면서도, 시설인권과 탈시설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므로 무언가 활동할 ‘꺼리’가 필요했다. 그 와중에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장애인생활시설 관련 연구용역 사업을 공모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장애우연구소를 연구수행기관으로 하고, 실질적으로는 <사변사>가 그 역할을 하기로 장애우연구소 측에 양해를 구했다. 연구책임자로는 에바다투쟁으로 고생하신 한신대학교 남구현 교수에게 부탁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임성만 전 한국장애인복지시설협회 회장을 비롯하여 총 14명을 연구자로 구성했다. 무슨 연구 사업에 이리도 연구자가 많냐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앞으로 탈시설 투쟁을 함께 만들어갈 이들을 이번 기회로 단단하고 끈끈하게 묶어내고 싶었다. 그리고 연구보조원도 두지 않았다. 모두 다 같이 시설조사를 나가서 다 같이 그만큼의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에 경력과 나이로 차등을 두는 방식을 반대했다. 참여한 14명 모두가 연구원 자격이었다.
사변사의 첫 활동으로 2005년 7월부터 <장애인생활시설 생활인 인권상황 실태조사> 라는 연구가 시작됐다. 우리는 제한된 연구비와 6개월의 짧은 연구기간임에도 욕심이 났다. 욕심이 항상 과로를 불러왔다. 연구기간은 6개월이었지만, 국가인권위원회와 서류절차가 마무리되는데 한 달이 걸렸고, 조사 이후 보고서 제출시한을 염두에 두니 실제 조사는 두 달 안에 이뤄져야 했다. 22개 시설을 8주 동안 조사하려고 보니 일주일에 전국의 2-3군데의 시설을 가야했고, 새벽에 출발해 하루 종일 면대면 조사를 마치고, 조사원들과의 평가회까지 마치면 한밤중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평가회를 꼭 진행했다. 참여한 조사원은 225명이었는데, 이들 또한 가까운 미래에 탈시설운동의 동지들이 될 터였다. 과로도 잊은 채 2005년의 6개월은 가열차게 흘러갔다.
쟤네들은 말도 못하는데 만나서 뭐 하게요?
그러나 거주인들을 면대면으로 만난 것이 우리 조사의 꽃이었다. 거주인들이 해주는 이야기, 단어하나, 눈빛과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 절절하고 절실했다. 그들의 거침없고 주옥같은 언어를 통해 사람이 시설에 들어가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가 우리 보고서에 담겨 세상에 알릴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다행이었다. 거주인 중에 의사표현이 힘든 경우도 많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한명 한명에게 조사원을 배치하고 대화를 시도하면서 직접 확인했다. 무수한 질문들에 무수한 대답들이 우리의 뒷통수를 때렸다.
“가족이 어느 날 갑자기 택시를 태워 시설로 데리고 왔다.”
“모르는 사람이 집에 와서 데리고 왔다.”
“형이 이곳에 내려놓고 갔다.”
“엄마가 아프니까 네가 시설에 가야한다,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하루 일과 중 낮 시간에 무얼 하나요?)
“하루 종일 누워서 자다 깨다 한다.”
“이 벽보고 누워 있다가 저 벽보고 누워 있다가 앉아 있다가 한다.”
“아무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것이 답답하다.”
(목욕시 불편한 점은 무엇이나요?)
“단체로 목욕해서 창피하다.”
“목욕 자원봉사자가 자주 교체 되서 수치심을 느낀다.”
“자원봉사자와 같이 하는데 목욕시간이 짧아 깨끗하게 해주지 않는다.”
(이·미용 서비스에 대해서 만족하나요?)
“다른 스타일로 하고 싶은데, 묻지 않고 다 깍아 버린다.”
“머리를 기르고 싶으나 요구하지 않았다. 안 되는 것은 일찍 포기한다.”
(본인에게 필요한 보장구가 있습니까?)
“휠체어는 밖에 나갈 때만 사용한다.”
“실내에서는 쓰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나는 실내에서는 그냥 기어 다닌다.”
(호칭 사용은 어떻게 합니까?)
“선생님이 관심이 없어서 아예 나를 부르지 않는다”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친구처럼 ‘야, 자’ 한다.”
“시설에서 대화한 적이 없어서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퇴소하기를 희망합니까?)
“15년 동안 이곳에 있었고 이젠 너무 익숙해서 나가기가 겁이 난다.”
“엄마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그때까지 참을 거다.”
“아버지가 노환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이곳에 데리고 왔는데,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누가 나를 데리러 오는 사람이 없으니 여기서 나갈 수가 없다.”


우리는 조사계획을 미리 알고 거주인들에게 답변교육을 시키는 시설을 더러 봤으므로 사전에 연락하지 않고 방문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조사권한을 가진 국가인권위원회 직원이 동행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는 매우 곤욕스러워 했고, 함께 갈 조사관이 없다고 했다. 결국 시설 측에는 조사 전날에 미리 연락하는 것으로 중재되었는데, 조사를 간다고 공문을 보내고 나면 어김없이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니들이 뭔데 함부로 우리 시설에 온다는 것이냐, 올꺼면 미리미리 알려주고 동의를 구해야지 일방적으로 전날 알려주면서 오겠다고 하면 어쩌자는 것이냐, 절대 문도 안 열어주겠다고 하였다. 우리는 조사의 객관성을 위해서 미리 연락을 안 한 것이며, 거주인중에 인터뷰를 거부하는 분이 있다면 그분은 인터뷰를 안 할 것이고, 그분들과 인터뷰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는 것은 맞지 않다고 설명했으나, 그 설명이 먹힐 리 없었다. 우리가 전날 연락했음에도 조사 당일 새벽부터 청소를 한다거나 이불을 새 것으로 바꾸거나 옷을 새 옷으로 바꿔 입거나 식사 매뉴가 달라진 곳도 있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햇볕을 가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경기도의 모 수사회에서 운영하는 시설원장은 달랐다. 그는 왜 오는지 물은 후 언제나 열려 있으니 와서 만나보라고 하였다. 천주교 수사였던 원장은 인터뷰과정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물었다. 시설에 있는 사람들의 인권보장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우리는 당장의 인권보장도 보장이지만 궁극에는 탈시설과 자립이 대안이 아니겠냐고 했다. 그러면서 바뀐 복지 정보와 시스템을 설명했다. 원장은 유심히 설명을 듣더니 “여기 있는 거주인들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군요. 나는 여기 있는 사람들의 일상의 무기력을 탓했는데, 정작 ‘시설병’에 걸려 있는 사람은 나였어요. 그런 것들이 있는 줄 몰랐네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평생 이렇게 밖에 살수 없을 것이라고 포기한 사람은 바로 나였네요.”


일상생활에서 자기결정권이 보장되지 않거나 물리적 폭력이나 언어폭력이 경험, 외출한번 할 수 없고, 시설 앞에 있는 슈퍼마켓도 가보지 못한 삶, 듣는 이야기마다 가슴 아팠지만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자신이 왜 거기 보내졌는지도 모르게 시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충분한 설명이나 이해도 없이, 삶이 통째로 바뀐 사람들. 시설운영자들은 사업 확장과 정부지원에만 목소리를 높였고, 거주인의 인권에는 관심이 없었다. 열등처우를 당연시했고, 누울 데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며, 단체생활에서 무슨 인권이냐고 했다. 누구든지 아름답고 빛나야 할 하루하루가 벽지무늬와 천장을 보면서 흘러갔다.
우리는 744명의 이야기를 마지막 보고서에 담으면서, 이들이 왜 여기에 보내졌는가에 대해 4자간의 침묵의 카르텔로 정리했다. 4자간 침묵의 카르텔은 장애인을 시설로 내모는 결과를 만들었고, 시설에서 장애인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 보장은커녕 인권이 유린되는 상황에 처하게 한 총체적인 요인이다. 이 침묵은 각각 다른 이유처럼 보이지만, 나와 다른 모습을 무능력 또는 부적응으로 부르며, 그 사람들은 시설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출발했다. 따라서 시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침묵의 카르텔’을 공고히 해온 것이다.
좋은 시설은 없다. 이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연구사업을 끝내면서 우리는 탈시설운동의 구체적 전략을 세워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시설 조사에 매달리느라 사변사의 내부 상황도 추스르지 못했다. 우리가 만난 사람은 744명이나 됐지만 이들을 탈시설운동의 당사자로 조직하기는 너무 힘들었다. 핸드폰을 가진 이는 거의 없었고, 우리와 자유롭게 연락할수 있도록 외부소통권이 보장된 곳도 없었다. 탈시설운동을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 막막했다. 그러다가 모든 연구사업에 마침표를 찍을 때 쯤, 744명중에 단 한명이 연락이 왔다. 발바닥이 탈시설을 지원한 첫 번째 사람, 바로 전라남도의 시설에 사는 김선심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