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서울시탈시설장애인주거대책촉구 1인시위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늘로 10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은 서울시탈시설장애인당사자모임 "보금자리"의 장희영씨가 1인시위를 진행했습니다.
- 서울시 체험홈 입주 자격 확대 및 물량 확대하라!!
- 서울시 자립생활가정 입주 자격 및 물량 확대하라!!
- 중증장애인 전세주택제공 사업 물량 중 탈시설장애인 할당하라!!
- 체험홈, 자립생활가정 입주 대상자 서비스 지원 확대하라!!
< 박원순시장님게 보내는 편지 >
박원순 시장님께
안녕하세요
먼저 서울 시장님으로 취임 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저는 이번에 서울시장 투표에 박원순 시장님께 한 표를 던진 장희영이라고 합니다.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온화한 성품을 가져서
서울 살림을 잘 이끌어 가실 분이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선거 유세 때 성북구청 앞에서 시장님을 뵌 적이 있어요. 옆집 아저씨처럼 편해 보였어요.
시장님 저는 시설에서 15년간 지내다가
작년 11월 세상 밖으로 나와서 자립하게 된 중증 장애인이예요.
어떤 사람은 비장애인도 살아가기 힘든데
시설에서 주는 밥이나 먹고 있지 왜 나와서 고생을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그분들은 시설 상황을 모르고 하는 얘기죠.
자유가 얼마나 그리운지
시설에서는 나오기 전까지는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요.
하지만 지금은 활동보조인의 도움으로
공공시설도 이용하고 또 은행도 이용하고
시장님께서 만든 아름다운 가게도 자주 이용한답니다.
처음에는 활동보조 시간이 터문히 없이 적어서 힘들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늘어서 외출도 하게 되어 좋아요.
하지만 요즘 가장 큰 고민이 있어요.
주거지 문제인데 아직까지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지원해주는 집에서 거처하고 있는데
이것도 계약이 끝나면 비워 주어야 하는 상황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시장님, 저와 같은 장애인이 자립하여 집 걱정 없이 정착할 수 있도록 집 좀 마련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2011년 12월 7일
장희영 올림
< 삶의 이야기 >
스물여섯, 최선의 선택
뇌성마비로 어릴 적부터 손은 몸 뒤로 뒤틀려 있었고,
얼굴은 항상 찡그리고 있었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1년 전부터 몸이 약한 날 학교에 입학시키려고
부모님이 출장소를 찾아다녔고,
다행히 이듬해에 입학통지서를 받고 학교에 들어가게 됐지.
바닥에 엎드려서 받아쓰기 연습을 했던 기억이 나네.
그러던 중 큰오빠가 군대에 가려고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허리디스크 판정을 받고 군 면제를 받게 됐어.
처음엔 그냥 디스크이거니 했는데,
점점 허리랑 다리에 힘이 없어지더니 지팡이를 써서 걸어야 했지.
서울의 한 대학병원까지 와서 진료를 받았지만 결국 병명은 찾을 수가 없었어.
그냥 신경성질환으로 나오더라고.
가정의 불화는 큰오빠의 증상이 심해지면서 일기 시작했지.
그때 아버지의 시선이 흡사 사탄의 그것과 같았고,
그게 너무 싫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왔어.
일산에 있는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2주 코스 컴퓨터 교육을 받았고,
국립재활원에 들어가서 제과교육도 받았어.
직업훈련원에서 남편을 만나게 됐거든. 나이차이가 조금 났지만,
그 사람이 숟가락만 들고 오라는 프러포즈를 했고,
양가 반대를 헤치고 결혼을 했어.
1년 후 아이를 낳게 되면서 몸이 무척 안 좋아졌어.
다니던 회사도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남편이 비디오가게를 운영하면서 아이와 나를 돌봐야 했거든.
남편은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그 땐 그 사람의 힘듦을 잘 몰랐어.
벌이에는 한계가 있었고,
내 몸은 점점 안 좋아졌으니 국립재활원에 얼마간 입원해 있다가
결국 시설을 알아보고 철원의 시설로 들어갔어.
그때가 1996년, 내 나이 스물여섯이었지.
누가 시설에 들어가 살고 싶겠어.
식구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고,
갈 데 없는 나에게 시설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곳이었어.
어린 딸아이도 떼어 놓고 갔으니,
독한 마음으로 들어갔지.
그때도 지금도,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뼛속까지 외로웠던 밋밋한 기억
내가 살던 시설은 요양원이었어.
나 같은 신체장애인이랑 지적장애인들이 함께 살았지.
예상은 했지만 시설의 첫 인상은 생각보다 충격적이었어.
여자들의 머리카락은 하나같이 짱뚱하게 밀려있었고,
남자는 파랑, 여자는 분홍색 똑같은 나일론 츄리닝을 입고 있더라고.
정확히는 직원들이 관리하기 쉽도록 머리카락 밀어놓고, 단체복을 입혀 놓은거지.
그런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고, 받아들이기 힘들었어.
‘아, 이곳에서, 이렇게 처박혀 살아야 하는구나.’ 절망했지.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시간이 지나니 적응이 되더라.
요양원 생활은 정말 외롭거든. 어디가든 하기 나름이라고 하지마는,
적응이 되지 전까지 뼛속까지 외로워야 했어.
힘들기도 했지만 직원들이나 그곳에 살고 있는 동료들과 친해지면서
소소한 즐거움도 있었지.
가끔은 ‘이런 것도 행복이구나!’ 싶기도 했어.
하지만 그 곳은 시설,
비포장도로를 차로 30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그 곳은 세상과 단절되어 있던 곳이 분명하지.
15년 살면서, 눈치 보지 않고 외출하는 것 따위는 사실 불가능했어.
첫 외출은 노조가 생긴 다음이었지.
그 전에는 휠체어 타고 나가려면 사람들 손이 필요한데 도와줄 사람도 없었고,
이동에 문제도 있으니까 스스로 포기해 버린 것도 있었고.
그래도 나는 낫지. 싫은 것, 좋은 것 말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나 같은 장애인(신체)은 지적장애인들과 짝을 이뤄서 살았어.
늘 부족했던 직원들 대신 그이들은 우리의 손이고 발이 되었지.
모든 것이 시설에서 지급대로, 딱 그만큼만 주어졌으니.
돌이켜 생각하면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어.
시설에 들어와서도 시간이 한 참 흘렀으니까
지금은 딸아이도 많이 컸겠지?!
시설에 들어온 후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이제 사춘기 소녀가 되었어.
웬일인지 내 몸은 갈수록 안 좋아지는데,
딸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니까 남편과는 이혼을 했어.
가족들도 여유롭게 살고 있지 않으니 나를 좀 도와 달라고 이야기 하긴 어려웠고,
‘그냥 나는 이렇게 살아야구나’ 생각했지.
그냥 시설에선 그랬어. 15년이나 살았는데, 별로 할 말이 없네.
어깨에 날개를 달고
답답한 생활에 나조차 무기력해지고 있을 때,
시설에서 나가서 결혼해 잘 살고 있는 지영과 정혁은 나에게 큰 힘이 됐어.
TV에 두 사람 사는 모습이 방송된 적 있는데,
‘나도 저렇게 살아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
하지만 시설에서 자립을 결심하고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무척 많이 걸렸어.
엄살일지 모르지만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버거워.
목부터 온 몸이 저리고, 마비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내가 밖에 나가서 잘 살 수 있을까?’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은 수 년동안 나를 시설에 묶어두었지.
작년여름에 시설에서 나와
시설에서 같이 살았던 경남이랑 종로에 살고 있어.
이제 1년이 됐는데, 아직까지는 밖에 나와서 살기 정말 잘한 것 같아.
활동보조가 모자라서 활동보조인 오는 시간에 맞춰서 화장실에 가야하는 거,
돈이 부족하니까 늘 돈 걱정해야 하는 거,
내년이면 지금 살고 있는 집의 보증금과 월세지원이 끝나는데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는 거 말고. 하하
시설에서 나와서 연극을 시작했어.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뇌병변장애가 아니라 근이양증이더라고.
갈수록 몸에 힘이 없고 움직이기도 힘들겠지.
숨도 쉬기 힘들어질 때가 올 거야.
최근에는 연극을 시작했거든.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
가끔은 죽음이 나를 갉아먹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해.
몸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무대에서 공연을 해보고 싶어.
아주 예전에 [사랑의 굴레]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고두심이 “잘났어 정말”을 외치는 그런 역할,
아주아주 표독스러운 악역도 해보고 싶은데.
얼마 전엔 전동휠체어를 개조했어. 자꾸만 목이 넘어가기는 하지만,
나 혼자 어딘가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줄 몰라.
어깨에 날개가 달린 기분 알아? 이게 정말 자유다 싶다.
시설에서 나와 제일 먼저 한 일이 장애인극단에 가서 면접을 본거야.
지금은 하루에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연극연습을 하고 있어.
곧 연극공연이 있는데 생각만큼 잘 안되더라구.
몸은 많이 힘들지만 정말 해보고 싶었던 연극 배우로
무대에 올라 공연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생각하면 신기하기도 하고 설레.
꿈을 이룬 지금 행복해.